조선을 성경 위에, 성경을 조선 위에
기독교 문필가이며 사상가이자 비폭력 민권운동을 전개한 민주화 운동가였던 함석헌 선생은 비록 야인으로 살았으나 근대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장로교적 배경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일본 유학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였다가 1953년 7월 이후에는 퀘이커교도가 되었고, 말년에는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고 동양의 노자, 공자, 석가 등을 끌어안으며 종교다원주의, 혹은 범종교론자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언론인, 재야운동가, 혹은 문필가이기도 했던 그의 호는 신천(信天)이었으나 씨알, 바보새로 불리기도 했다.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의 바닷가 마을인 부라면 원성동에서 한의사였던 함형택(咸亨澤)과 김형도(金亨道)의 3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장남과 차남이 생후 곧 사망하여 함석헌은 장남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이 마을에는 함석헌의 삼촌이자 한학자였던 함일형에 의해 이미 개신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함석헌은 삼촌 함일형을 “첫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1906년부터 함일형이 운영하던 한학서당 삼천재에서 한문을 배우고, 함일형으로부터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된다. 1914년 졸업 후 양시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16년 졸업한다. 그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에는 황순득과 혼인하였다.
평양고보 3학년 재학 중 3·1운동이 발발했는데, 평양경찰서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시가행진에 참여하는 등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사건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게 된 그는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게 된다. 1921년에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 시기에 평생의 스승인 류영모(柳永模, 1890-1981)를 만나게 되고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으로부터 ‘민족애’를 배우게 된다. 특히 남강 이승훈의 영향은 컸는데 “남강은 과연 조선에서 등촉(燈燭)이었다”고 술회했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일본으로 갔는데, 그해 9월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이란 이유로 구류를 살기도 했다. 1924년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였고 1928년 졸업했다. 이 시기에 우치무라 간조의 집회에 참석하며 무교회 신앙을 배우고 야나이하라 다대오, 후지이 다께시 등의 문서를 접한다. 또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의 동지들과 친분을 쌓는다. 이런 연유로 함석헌은 김교신 등 동료 5인과 함께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기에 이른다. 우치무라 간조의 “일본을 성경 위에, 성경을 일본 위에” 정신을 적용하여 “조선을 성경 위에, 성경을 조선 위에”(Korea on the Bible, The Bible on Korea)라는 취지에서 ‘성서조선’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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