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A.D. 64년 네로에 의해서 처형당하기 전,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더불어 또 다른 근심에 휩싸여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가 진리에서 돌이켜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변질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3-4절)
바울이 말한 ‘사람들’은 단지 믿지 않은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이 말한 사람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 경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육체의 욕망대로 살고, 죄 된 생활을 하고, 바른 교훈을 거절하고, 말씀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러한 상황에서 해야 할 일들을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귀 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1.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신중하다’라는 말은 ‘일을 조심스럽게 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쓰인 헬라어 단어 네포(νήφω)라는 말은 ‘정신을 차린’, ‘술 취하지 않은’, ‘깨어 있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즉 사람들 대부분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사욕을 채우려고 진리에서 돌이킬 때, 그리고 그것이 교회 안에서 전반적인 분위기가 되어갈 때, 그것에 휩싸여 따라가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서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분별하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하나가 있는데, 정호승 시인이 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라는 시인데, 그 시의 한 대목이 이렇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무엇이 우리를 깨어 있어 세상을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의 믿음을 거절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사30:1)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을 의지하고, 그들과 맹약을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난국을 헤쳐 나갈 계획과 전략을 세우고 애굽과 동맹을 맺어 안전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는 이 시대의 수많은 계획과 전략도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2.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 ‘고난을 받으며’라는 말씀은 “고난을 견디고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습니다.(마7:14) 또한 거기에는 많은 고난과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실하게 믿음생활 했는데, 나중에 믿음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난을 참고, 견디어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딤후2:16)
바울사도는 후메내오에 대해서 “믿음에 있어서는 파선한 자요, 양심은 버린 자”라고 말했습니다. (딤전1:20)
사람을 통한 시험, 물질을 통한 시험, 영적인 시험을 통해서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변질시키고자 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와 같은 시대적인 환난의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이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수십 년 전에 일본의 사과 산지인 아오모리 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오모리 현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과 산지로, 우리가 즐겨먹는 부사도 아오모리 현이 원산지라고 합니다. 이 사과 산지에 어느 해 강력한 태풍이 불어서, 출하를 앞둔 과수원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사과의 90%가 태풍으로 떨어져 상품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농부들이 태풍의 피해로 망연자실 하고 있었을 때에, 태풍에 견딘 10%의 사과를 보고, 일명 ‘태풍에도 안 떨어지는 사과’라고 이름 붙여 2-3배의 가격을 받고 시중에 판매했습니다.
그 때가 일본 대학의 입시철이었는데, ‘안 떨어지는 사과’가 수험생들에게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래서 그 사과 이름이 ‘합격사과’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안 떨어지는 사과와 같아야 합니다. 사람이 시험 들게 하고, 눈앞에 캄캄한 일을 만나고, 물질의 어려움을 당하고, 기대하고 기도한 것들이 무너지고, 응답이 안 되어도 우리는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니까, 믿음이 흔들리는 현상이 보입니다. 미래 학자들은 지금까지의 통계로 볼 때, 이번 코로나로 인해서 한국교회의 1/3이 성도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측을 합니다. 고난을 견디고,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서 “전도자의 일을 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전도하라, 사람을 교회로 인도해 와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도자’란 ‘말씀 선포자’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였습니다.(2절) 단순히 입으로 설교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즉, 자신의 삶을 통해서, 경책하며(correct), 경계하며(rebuke) 권하라(encourage)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말씀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말씀이 내 입술과 머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내 마음과 내 손과 발을 통해서 내 삶으로 살아지는 것이, 전도자의 삶입니다.
우리 교회 한 女(여)집사님께서 한 불교재단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계십니다. 작년 코로나로 인해서 요양원의 면회가 중단되고, 더불어서 그 요양원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시던 외부 목사님들의 발걸음도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요양원에서 그 동안 예배에 참석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시간들이 한 달, 두 달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집사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말씀을 읽어 드리고, 기도도 해 드리고, 믿음의 위로도 해 드렸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고, 자신이 어떤 의무가 있어서 한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단지, 믿는 사람으로 언제 하나님 앞에 갈지 모르는 어르신들의 영혼에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모여들어, 함께 예배드리게 된 것이고, 그 집사님은 예배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주신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은,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직무라는 말은 헬라어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라는 말을 썼습니다. 여기서 ‘직무’란 ‘봉사,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교회의 목사로, 장로로, 교사로, 성도들을 섬기는 자로 세움을 입었는데, 그 일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 직무를 버려두지 말고,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봉사의 일을 완수해라! 항아리로 말하자면, 아귀까지 물을 채우듯이, 봉사의 일을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렵더라도 자신의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교역자들은 성도들의 본이 되도록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로와 권사님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마중물이 되도록 헌신과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집사님들은 주님의 역사가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도록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중물과 같은 충성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를 온 성도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직무입니다. 주님은 그 직무를 다한 사람들이 받을 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 들리라”(누가복음 12:37)
반면, 누가는 자기의 얕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봉사의 일에서 떠나 자기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종들에게는 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누가복음 12:45-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믿음의 위기와 고난 가운데 서 있습니다. 이 고난은 개인적인 고난을 넘어, 교회를 흔드는 거대한 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도의 징조와 곳곳에서 믿음이 떨어지는 조짐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도 모든 일에 신중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직무를 다하여, 고난을 이겨내고, 우리를 부르신 이에게 칭찬을 듣는 충성된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작권자 기독타임즈 ⓒ무단전재 공유언론사, 협력교회 및 기관 외 재배포 금지
대전충청지역 대표 기독교주간신문사 기독타임즈(kdtimes@hanmail.net)
발행인=오종영 목사 ㅣ 사업본부장=이승주 기자 ㅣ 충청영업소=임명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