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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큰 기쁨 (마태복음 28:1-8) 233호
박경배 목사(송촌장로교회)
 
편집부   기사입력  2021/04/07 [16:49]
▲ 박경배 목사/송촌장로교회     ©편집국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윤리적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만이 아닌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착하게 살아라. 나쁜 짓 하지 말라. 정의롭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정직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권력과 재물, 그리고 어떤 세력에도 타협하지 않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자연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선언이요. 절망에 대한 소망의 선언이요, 현재에 대한 영원의 선언이요, 지옥에 대한 천국의 선언입니다.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기 위함이었습니다. 무덤 가까이 이르러 본즉 무덤 문이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 무서워하고 있을 때 천사가 말합니다. 

 

5~6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여인들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천사가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주었고 무덤 문이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믿어지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부인도 못하면서 적극적으로 믿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이 여인들의 신앙 상태입니다. 

 

8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여인들의 영적 상태는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입니다. 왜 무서워합니까?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부활, 다시 사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설명할 수는 없는데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믿어집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여인들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두려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두 마음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믿으려고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심하면서 믿고 믿으면서 의심합니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기뻐했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반신반의했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부인도 못하고 그렇다고 긍정도 못합니다.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만, 부활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불확실한 신앙이 살아났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자 확신이 생겼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이해가 되고 나를 위한 사건으로 은혜가 되었습니다. 부활이 믿어지고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에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부활을 지식적으로 알고 믿을 때 입술의 신앙고백은 될 수 있었으나 능력은 없습니다. 부활이 능력이 되려면 성령 체험을 해야 합니다.

 

여인들은 큰 두려움과 큰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뛰어갔습니다. 빈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신앙은 무덤을 떠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은혜 체험 없이 인간적인 열심으로 사랑하고 헌신한 사람들은 무덤을 쫓아가는 신앙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시신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시신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영원히 무덤에 갇힌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무덤에 누운 시신 예수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무덤을 떠나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졌던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고 자식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돈을 떠날 수 있고 명예를 떠날 수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의 무덤에 갇혀 살지 않습니다. 무덤을 파고 살지 않습니다. 무덤을 찾는 신앙이 아니라 무덤을 떠나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의 시신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교리적 신앙이나 제도적 신앙이 아닌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는 신앙이 부활 신앙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갔습니다. 신앙은 달려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데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뛰어가고 찬양하며 기적을 선포하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급히 뛰어가고 있는 여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9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부활하신 주님의 첫 메시지는 “평안하냐?”입니다. 이 말씀은 “평안이 그대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뜻입니다.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오셔서 주시는 메시지는 ‘평화’입니다. 왜 평화입니까? 예수님이 부활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불의와 부정을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늘이 주는 평화입니다. 육체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만족감으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부활의 평화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평화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평화가 그대들에게 있을지어다.” 하셨을 때 여인들은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여인들의 반응은 먼저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서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는 것은 겸손과 예배를 의미합니다. 영광스러운 그분께 경배한 것입니다. 모든 교만과 높아진 마음을 꺾고 그분의 발을 붙들고 경배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들이 왜 하나님을 잘 믿지 않습니까? 마음과 생각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있고, 돈이 있고, 세상의 명예가 있기에 교회에서도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나아 올 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곳으로 임합니다. 무릎을 꿇고, 그분의 발을 붙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왜 피곤합니까?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없고 사역만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이렇게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10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음성은 “무서워하지 말라”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색깔의 고통으로 절망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그분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질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고전15:54~58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혹시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10절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첫사랑, 첫 만남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던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풍랑 위를 걸어오시며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주님과 만났던 첫사랑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마음을 열어 주님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그 자리 내 생명 드리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던 자리, 주님을 만나서 울고, 울고 또 울었던 행복했던 그 자리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식은 가슴으로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도 감사했고 찬송했던 입술에 불평과 불신앙의 언어가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첫사랑이 회복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사명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잃어버린 사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은 실수하지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사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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