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 담임으로 일하게 되는데, 소양이 직접적으로 신사참배 문제에 연루된 때를 경남노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키로 결의했던(이 점에 대한 실증적 기록이 없다) 1931년으로 본다면 그는 이때로부터 1944년 순교할 때까지 13년간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운 셈이다. 이런 그의 생의 여정을 살펴볼 때 신사참배 문제는 그의 생애를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인도해 간 영적 싸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완전무장한 조직적인 거대한 세력 앞에서 외로운 투쟁을 계속했다. 그의 싸움은 ‘신앙만의’ 싸움이었고 그의 싸움의 기초는 ‘신앙적 정의’(Recht)였다. 따라서 그의 생애와 신앙의 자취,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적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사참배 거부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 신사참배가 ‘문제시’된 것은 1930년대 이후이지만 신도(神道)의식을 행하는 신사(神社)가 조선에 소개된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선다. 1876년 개항 이래 부산에서 일본인의 집단 거주가 시작되면서 일본인의 토착종교인 신사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사는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종교생활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25년에는 이미 42개의 신사(神社)와 108개의 신사(神祠)가 세워졌고, 같은 해 조선 신사제도의 총 본산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남산에 건립되었다.
1930년대를 거쳐 가면서 정세는 급변하였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고, 일제는 전쟁정책 수행을 위한 소위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운동의 일환으로 신사참배가 권장되고, 1935년부터 강요되기 시작했다. 기독교계는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탄압이 심화되면서 회유와 변절이 일어났고, 천주교는 1936년 5월에, 감리교는 1938년 9월에, 장로교회도 그해 9월 10일 제27차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게 된다. 1938년 이후 소위 시국(時局) 인식이란 이름하에 행해진 기독교계의 친일행각은 암울한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이러한 신사참배 강요의 과정 속에서 이를 강하게 반대하고 저항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였다.
주님께 바칠 것은 목숨뿐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가 강요될 것을 미리 예견한 듯이 1934년 장로교 종교교육부가 발간한 〈종교시보〉 8월호에 “사(死)의 준비”라는 설교문을 기고했는데,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의 삶의 행로를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1938년 다시 “사의 준비”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설교한 점을 보면 그는 신사문제에 대해서 이미 확고한 신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의 순교는 오랜 순교적 삶의 결과였다. 주기철 목사는 자신이 아는 바대로 말했고, 믿는 바대로 실천했던 자기 신념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고,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양심을 위하여 황량한 들판에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기독타임즈 ⓒ무단전재 공유언론사, 협력교회 및 기관 외 재배포 금지
대전충청지역 대표 기독교주간신문사 기독타임즈(kdtimes@hanmail.net)
발행인=오종영 목사 ㅣ 사업본부장=이승주 기자 ㅣ 충청영업소=임명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