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9월,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는 신사참배안이 가결되자 한상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1939년 10월 이후 밀양 마산리교회에서 약 2개월간 체류했다. 이곳에서 경남지역에서의 신사불참배운동을 조직화했다. 특히 최상림, 손명복, 이인제, 조수옥, 최덕지 등과 함께 이 지역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규합하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신사참배 행위는 범죄 행위임을 인식시켰다. 결국 한상동 목사도 1940년 7월 3일 체포되었고 해방되기까지 5년간 평양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고려신학교 설립, 고신교회의 문을 열다
해방과 함께 8월 17일, 평양감옥에서 동료 19명과 함께 출옥한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했던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으나 곧 월남하였고, 경남지방에서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일제하에서 범한 죄를 회개, 청산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워가려는 영적 쇄신운동이었다.
1946년 6월 12일부터 4일간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가결하자 주남선 목사와 함께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박윤선 목사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1946년 9월 20일이었다.
한상동 목사에게 새로운 신학교 설립은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신학입교(神學入敎)의 의지였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칼빈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박윤선 목사를 교수로 초빙했다. 후에는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하였으나 6개월 후 결별한다. 고려신학교 설립 후 부산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일하게 되는데, 고려신학교를 둘러싼 논란과 대립은 경남교회의 분열을 초래한다. 김길창 목사는 자기 보위 수단으로 경남노회를 이탈하여 별도의 노회를 조직하였고, 한상동 목사는 당시 장로교총회 유지재단으로부터 명도를 요구받아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1951년 10월 삼일교회를 설립한다.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이 총회에서 축출되자 1952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고신교회의 시작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설립한 고려신학교는 1968년 2월에는 대학에 준한 각종 학교로, 1969년 9월에는 대학 동등학력 인정 지정학교로, 1970년 12월 30일에는 고려신학대학으로 발전하였고, 1993년에는 고신대학교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상동 목사는 1974년 1월 고려신학대 학장에서 정년 퇴임할 때까지 28년동안 고려신학교 설립자, 운영의 실제적인 책임자, 혹은 교수와 교장, 학장으로 활동했다. 또 삼일교회 설립 때부터 1972년까지 목회자로 활동하고 1976년 1월 6일 세상을 떠났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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