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이 “남북통일을 위해 북한에 기반을 둔 조선민주당 대표로 당수 조만식을 대리하여 부당수 이윤영을 지명한다”라는 이유로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국회의 인준을 요청했지만, 한민당 계열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후 그는 제1공화국에서 네 차례나 국무총리에 추천되었으나 그때마다 정치적인 이유로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다. 결과 대한민국 역사상 네 차례 국무총리로 임명받고, 국무총리 서리만 두 차례 역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초대 내각의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고, 10월에는 경제원조회담 제1차 회의에 참여하여 “미국의 잉여농산물과 구호물자를 원조받는 대신 한국 정부를 지도 감독한다”고 명시한 조항을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여 삭제를 요구하고 성사시켰다. 1952년 제2대 사회부 장관에 이어 무임소 장관에 다시 임명되었다.
이윤영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중용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북한에서 공산당과 투쟁하면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월남한 첫 번째 인사이면서, 조선민주당 부당수 출신이라는 상징성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던 이승만에게 꼭 필요한 보완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치영, 이범석, 임영신 등과 함께 ‘친 이승만 인사’이면서도 자유당 내 이기붕 계열이 성장하면서 이승만 곁에서 밀려난 정치세력에 속했다. 1952년 8월 조선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제3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이듬해 5월에는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학장에 취임했다. 1956년 제4대 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58년 5월 조선민주당 당수에 선임되었다. 이때 그는 자유당 후보에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고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싸움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방이나 찢으러 가는거지. 이기붕이를 떨구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목회와 강연 활동으로 지내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국민의당 최고위원 등을 맡았다. 1970년 마지막 공직인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으며, 1974년 10월 1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경기고 평택 고택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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