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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 칼럼] 나쁜 까마귀, 착한 까마귀
대전주님의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기사입력  2021/07/08 [11:58]
▲ 대전주님의교회 박기성 목사     ©이승주

 

어제는 고향 익산에 볼 일이 있어 다녀왔습니다. 대전에서 계룡을 지나는 도로가에 까마귀 몇 마리가 뭔가를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로드킬을 당한 동물의 사체입니다. 차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녀석들은 동물의 사체를 뜯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저주와 관련하여 ‘새’가 등장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며 저주합니다. 여기서 ‘공중의 새’는 아마도 까마귀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고대 그리스의 욕 중에 “까마귀에나 가 봐라!”는 욕이 있었다고 합니다. 죽어서 까마귀가 뜯어 먹도록 시체나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엘리야의 저주는 살이 떨리는 무서운 저주이자 가장 심한 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물의 사체를 먹어서인지 까마귀는 성경에서 ‘부정한 동물’로 분류됩니다(레 11:15). 부정한 동물이란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영향 때문인지 서양 사람들은 대개 까마귀를 흉조(凶鳥)로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까마귀가 꼭 흉조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3년 반의 가뭄이 있을 때에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까마귀들을 동원하여 아침저녁으로 빵과 고기를 가져다 주셨습니다(왕상 17:6). 

 

예전에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까마귀가 왔다갔다”는 말씀을 종종 들었습니다. 끼니를 걱정하며 목회하던 그 시절에 누군가가 와서 살며시 먹거리를 놓고 간 것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저 역시 까마귀의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첫 목회를 할 때입니다. 어른 교인 두 명과 어린아이 십여 명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례비도 없었습니다. 종종 부모님으로부터 쌀을 얻어다 먹기도 했지만 매번 쌀을 달라고 말씀드리기도 민망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당 뒤쪽에 쌀 한 포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까마귀가 가져다 놓은 것이지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그 까마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젊은이인지 노인인지, 노인이라면 세월이 꽤 흘렀는데 지금도 살아 계신지...?  

 

세상에는 남의 불행을 기회 삼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드는 나쁜 까마귀가 있는가 하면, 이름 없이 남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착한 까마귀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까마귀가 흉조는 아닙니다. 

 

엘리야에게 그랬듯,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착한 까마귀들이 많은 아름다운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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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7/08 [11:58]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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