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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 칼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예수님
대전주님의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기사입력  2021/03/24 [12:00]
▲ 대전주님의교회 박기성 목사     ©이승주


<아르나우의 성전>(원제 La catedral del mar)은 14세기 중세시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를 배경으로 하는 스페인 드라마입니다.  농노인 베르나트는 영주에게 아내 프란체스카를 빼앗기고 젖먹이 아들 아르나우를 살리기 위해 도망칩니다. 그렇게 아르나우는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조차 알지 못한 채 힘든 삶을 이어갑니다. 

 

아르나우는 친구 조아네트가 부럽기만 합니다. 사실 조아네트의 어머니도 그의 아버지에 의해 출입문조차 봉쇄된 창고에 갇혀서 얼굴조차 볼 수 없지만 작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조아네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습니다. 아르나우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조차 부러웠던 것입니다. 이때 베르나트와 아르나우가 나눈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엄마를 잃은 아이들에게는 성모 마리아가 있단다.”

“어디에 있는데요?”

“하늘에 계신단다.”

“하늘에 있는 엄마가 무슨 소용이에요. 머리도 쓰다듬어 주지 않을 거고, 나랑 놀아주지도 않을 거고, 뽀뽀도 안 해 주고....!”

 

그렇지요. 어린 아르나우에게는 지금 옆에 계셔서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놀아주기도 하고, 사랑한다며 뽀뽀도 해 주는 그런 엄마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만 계시는 엄마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심지어 믿음의 사람 다윗조차도 하나님의 부재(不在)에 대하여 탄식했음을 기억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부재’는 육체의 고통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아픔입니다. 얼마나 그 아픔이 컸으면 서른 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김흥겸 전도사는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 먹은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언뜻 들으면 불경한 노랫말로 들리지만, 그의 중심은 노랫말과는 달리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일 것입니다.

 

아르나우의 말처럼 하늘에만 있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멀리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렇게 느낄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또한 아르나우가 되고, 다윗이 되고, 김흥겸 전도사가 되어 불경한 노래를 내뱉곤 합니다.

 

하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부재를 우리만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도 그의 조상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절규하며 하늘과 땅을 흔들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혹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십니까? 그래서 고통스럽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철저히 소외와 고통을 느끼셨던 예수님이 곁에 오셔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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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24 [12:00]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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