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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이제 다시 십자가로 돌아와야 합니다
통일선교회 임명락 권사
 
편집부   기사입력  2020/10/06 [14:54]
▲ 통일선교회 임명락 권사     © 편집부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고(故) 옥한흠 목사님은 “교회를 채우기 위해 전도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를 만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 말은 C.S.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한 말이다. 옥한흠 목사님은 루이스의 이 말을 빌려 “교회는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 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부인’을 전제한다. 또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얼마 전에 성경을 읽다가 어느 부분에서 눈동자를 멈춘 적이 있다. “그의 죽으심을 본 받으라”(빌 3:10)는 말씀에서이다. 세상에 ‘죽는 것’을 본받으라니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내뱉은 이 말처럼 산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해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다. 대신에 그는 ‘그리스도’를 선물로 얻었다(빌 3:7-9).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A.W.토저가 ≪이것이 성공이다≫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것들을 움켜쥐는 것이 ‘성공’과 ‘출세’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 그런 우리들에게 토저는 “정신 차리라”고 충고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라고 조언해 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세상 것을 손에서 놓지 못할까? 평신도뿐만 아니라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까지도 ‘세상적인 성공’의 모델을 교회에 도입하려 하고, 예배당의 크기와 교인 숫자에 의해 목회의 성공과 실패를 따지려 할까? 수십 년간에 걸쳐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제2성전을 예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 21:6)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자기를 사랑’(딤후 3:1)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 이니라”(막 8: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사랑’은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게 한다. ‘자기 사랑’은 남들보다 더 높아지고 싶게 하고, ‘자기 사랑’은 더 큰 예배당을 건축하여 자랑하고 싶게 한다. 심지어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이웃 교회에게도 말이다. 그러니 모든 교회가 경쟁상대가 된다.

 

‘설교의 황제’라고 불렸던 스펄전 목사님은 목회자를 손목시계와 공공건물에 걸린 시계에 빗대어 설명했다. 아마도 스펄전이 목회할 때는 손목시계보다는 공공건물에 걸린 시계에 더 의존했던 시대였을 것이다. 손목시계가 잘못되면 자신 외에는 시간을 착각할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공공건물에 걸린 시계나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계가 잘못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착각할 것이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시계와 같아서 많은 이가 그를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목회자가 바르지 못하면 그들 모두 크든 작든 잘못된 길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최근 이와 같은 실제의 예를 경험해 보았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자칭 보혜사라고 주장하는 신천지의 이만희 씨나 전(前) 한기총의 총회장을 지낸 전○○ 목사의 잘못된 가르침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그릇된 곳으로 인도했고, 더 나아가 수많은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말이다.

 

이 일로 인해 교회는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지긋지긋한 곳’, ‘없어져 버려야 할 곳’, ‘쓰레기처럼 치워버려야 할 곳’ 등의 모진 뭇매를 맞고 있다. 우리는 이런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렇다 할 변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까닭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까닭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에 생명을 주기는커녕 염려와 걱정의 대상이 된다면 예수님은 매우 슬퍼하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비난과 고통이 그냥 의미 없는 아픔만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자초한 이 고통이 C.S.루이스가 말한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다시 ‘십자가’로 돌아와야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님이 세상 속의 기쁨과 즐거움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도 이제 세상적인 ‘성공’의 길에서 ‘십자가의 길’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손에 대야를 들고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러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다시 세상으로부터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잃은 신뢰를 다시 찾을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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