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권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이대위원장,빛과소금의교회) ©편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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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성도들에게 둘째 부활이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첫째 부활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만한 본문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24절이다. 22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고, 23절에서 삶을 얻는 대상을 구별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이고, 두 번째는 강림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고, 세 번째는 24절 대로 최후 심판 때를 두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설명하면서, 두 번째에 삶을 얻는 대상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라고 명확히 그 경계선을 그음으로, 두 번째 삶을 얻는 대상은 모든 성도인 것이 분명하고, 그렇지 않은 대상은 여기서 제외된다. 그러면 세 번째에서 언급하는 삶을 얻는 대상은 그리스도 밖에 사람들이고, 불신자들과 악의 세력들인 것이 확실하다.
혹 이러한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 6절의 첫째 부활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성도들의 부활이 다단계에 걸쳐서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고, 불신자 역시 동시에 부활 되어 심판을 받으나,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의 설명을 참고한다면 불신자의 부활을 구분하여, 모든 성도의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접근할 수 있다.
4.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의 비교
요한계시록 20장에 등장하는 천년왕국과 관련하여, 전천년설은 20장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주장이고, 무천년설은 전체 내용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장이다. 전천년설을 받아들이면, 부활과 예수님의 강림을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어긋나기에 절대적인 주장이 될 수 없다. 무천년설은 전천년설을 고려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안고, 상징적으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것인데 이 경우 20장의 내용을 두고 상징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성경적 절대적 당위성을 가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서로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각자의 입장을 정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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