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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南慈賢, 1872-1933, 전도인, 독립운동가, 영화 “암살”의 실존모델) ①
김형석(경희대학교 역사학박사(Ph.D), 전 총신대학교 교수(전임대우)
 
편집부   기사입력  2020/11/09 [17:20]

안동 아낙의 너울을 벗다 

남자현은 1872년 12월 7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에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통정대부를 지낼 만큼 학식이 뛰어나 70여 명의 문하생을 두었고, 남자현도 한학을 배우며 《소학》, 《대학》을 읽었다. 19세 때 안동 출신으로 부친의 제자이던 김영주에게 시집을 갔다. 1895년 을미사변 후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김영주는 결사보국(決死報國)을 선언하고 영양 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의 진에 들어가서 전투 중에 사망했다. 졸지에 과부가 된 그녀는 유복자인 김성삼을 낳은 뒤 시부모를 모시고 양잠으로 살림을 꾸렸다. 고된 살림살이 중에도 아들을 훌륭히 키우고 시부모 봉양을 마친 후에는 홀연히 집을 떠나 남편 원수를 갚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1911년 전도부인 전원구가 영양군 수비면에 계동교회를 개척하자, 계동의 친정에 머무르던 남자현도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남편을 잃고 외로운 처지여서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이었고, ‘여필종부(女必從夫)의 가르침’에 익숙했던 그녀가 성경을 배우면서 에스더같은 구국의 여성상을 접하고는 의식이 완전히 바뀌었다(기독교 입교는 증손자 김종식의 증언임).

 

남자현은 1919년 2월 하순, 교회에서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상경했다. 연희전문학교 근처 창천교회에서 열린 비밀회의에 참가한 후 3월 1일 오후 시내 곳곳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3월 9일 압록강을 건넜는데 47세 때의 일이다. 당시 서간도에는 이상룡(李祥龍), 김대락(金大洛), 김동삼(金東三)등 안동 명문가 출신들이 식솔을 데리고 집단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해서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1만 3,930명(2015. 1. 1. 기준) 중 2,080명이 경북이며, 그중에도 안동 출신이 353명으로 월등하게 많다. 남자현은 동향출신이 집단 거주하는 통화현에 정착하고, 그해 5월 결성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남자현은 부상당한 독립군 병사들을 겨울 내내 간호하여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불리었다. 한편 남자현은 독립군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신앙생활에 힘써 길림 용정에 있던 성서학원에서 성경을 공부한 후 여성계몽과 교회 설립을 위한 순회전도에 나섰다. 조선인 마을을 다니면서 여성들을 모아놓고 전도와 계몽운동을 벌였다. 이런 그녀의 헌신으로 12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10여 곳에 여성교육회가 결성되었다. 여류 시인 고정희는 남자현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경북 안동 출신 남자현, 열아홉에 유생 김영주와 혼인하여 안동 땅에 자자한 효부 열녀 쇠사슬에 찬물을 끼얹고, 여필종부 오랏줄을 싹둑 끊으니 서로군정의 독립단의 일원이니라. 북만주 벌 열두 곳에 해방의 터(교회)를 닦아 여성 개화 신천지 씨앗을 뿌리며….” -고정희, “남자현의 무명지”에서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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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09 [17:20]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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