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했다.
중일전쟁 이후 계속 일본군에 쫓겨 이전하던 임시정부를 마지막으로 궁벽한 중경으로 옮기고 장개석의 도움을 받았다. 김구는 중경에서 마침내 김원봉 등과 함작해 광복군을 조직했다.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 박찬익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통일을 위한 노력
김구는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 답사에서 “임시정부는 결코 모일계급(某一階級), 모일파(某一派)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통한 이해입장에 입각한 민족단결의 정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전 민족이 총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에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호소했으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945년 11월 23일 개인 자격으로 김규식 등 임정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하여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하여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 통치한다는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반탁투쟁을 주도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1948년 2월 26일 총선거를 감시하려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북한이 거부함으로써 남한만이 총선거를 하자는 미국 제의가 유엔소총회에서 결정되었다.
이에 김구는 한국 분할을 반대하며 남북통일에 최후까지 노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2월 13일 “삼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합”이란 글에서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구는 남한 단독 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을 비롯한 한민당 계열과 결별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우익 최대정파인 한민당과의 결별로 통일 추진은 역부족이었다.
그는 단독정부반대운동이 어려워지자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남조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는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이 그의 평생의 최대 목표였으나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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