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설립
벨 등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들이 세운 학교는 정식학교는 아니었지만 교회가 설립된 곳을 중심으로 남학교와 여학교를 세워 미국식 교육을 통해 문맹퇴치와 함께 호남지역에 신학문을 도입하였다. 1900년도 초에 설립된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학교는 목포에 정명여학교(1903)와 영흥남학교(1903)가 있고, 광주에는 숭일학원(1907)과 수피아여학교(1908)가 있으며, 순천에는 매산학교(1910)가 있다. 이 학교들 중 목포 정명여고와 영흥고, 그리고 광주 숭일학원과 수피아여고는 벨이 직접 관여하여 설립한 학교들이다. 미국 남장로회가 전남지역에 설립한 학교는 이들 외에도 정식학교로 발전하지 않은 많은 학교들이 있었다.
교회 설립
벨은 1914년 전라노회장을 역임했고, 1914년 9월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는 등 교회정치를 위해서도 여러 각도로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그가 전남 지역을 두루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설립한 것에 비하면 그렇게 큰 무게를 차지하지 않는다.
벨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그 지역의 최초 또는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교회들이 다수 있다. 목포의 경우 목포 거점 선교부가 준비되면서 시작한 양동교회, 양동제일교회, 새한교회, 그리고 목포창조교회는 목포의 초대교회이며, 광주의 경우 잉계교회(우산리교회/삼도교회, 송정중앙교회, 송정제일교회)가 광주의 초대교회이다. 그리고 역시 광주의 경우 광주 거점 선교부가 설립되면서 시작한 양림리교회는 광주읍성 내 북문안으로 이전하여 북문안교회(광주제일교회, 광주중앙교회, 광주양림교회)가 되면서 광주읍성의 초대교회가 되었다.
벨 선교사는 한반도에 입국하자마자 콜레라에 감염된 환자들을 간호하느라 자신과 그의 부인까지 잠시 요양을 해야 할 정도로 힘든 신고식을 했다. 미국에서 결혼한 첫 번째 부인이 1901년 목포에서 사망했고, 두 번째 부인은 일본인들이 불태운 제암리교회 현장을 다녀오던 중 발생한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는 일을 지원하였고, 전남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다. 세워진 교회는 훈련된 한국인 조사(助師)나 전도인이 직접 목회하도록 하고 자신은 담임 지역 전체를 순회하면서 여러 교회 형편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그의 모교인 켄터키 주 중앙대학교는 1920년 그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25년 9월 28일 57세의 나이에 그가 갑작스럽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갔을 때,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그를 향한 애도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는 우리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현명한 조언자였으며,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으며, 진정한 우정을 가졌으며, 신실한 신앙과 주님의 일을 완수하려는 열정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현재 광주광역시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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