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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깊은 신앙 (느헤미야 1:1-11) 217호
류명렬 목사/대전남부교회
 
편집부   기사입력  2020/05/22 [15:05]
▲ 류명렬 목사 / 대전남부교회     ©편집국

‘참된 믿음’은 ‘성공 스토리’와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매우 가난했고, 그의 환경은 혀를 찰 만큼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자신의 가난과 불행을 극복하고 성공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재산과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고 일어날 수 있는 많은 변화 가운데 한 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승진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공식도 아니고, 또 그것이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 믿는 사람의 눈에 성공과 건강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한 신문의 사설에 “n번방과 7번방”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n번방’은 한마디로, ‘무자비한 탐욕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위 자신들의 ‘노예’를 물색하여 노리개로 삼고, 덫을 만들어서 옴짝달싹 못하게 했던 ‘주범들’과 수 백 만원의 돈을 내면서, 그것을 바라보며 즐기는 ‘고객들’로 이루어진 탐욕의 공간이 n번방 입니다. 필자는 그 n번방 사건을 듣자마자, 몇 년 전에 우리 사회에 감동을 준 ‘7번방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지적 장애인 아버지와, 그가 누명을 쓰고 들어간 7번방에 함께 있었던 죄수들이 펼치는 감동의 이야기가 바로 ‘7번방의 기적’입니다. 그 ‘7번방’에는 사랑과 배려와 헌신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이 두 방을 비교하면서, 필자는 교회를 방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깁니다. “교회라는 이 방도 내 이기적인 욕망만 채우려는 열정으로 가득하다면, 또 하나의 n번방이리라. 웃고 즐길지 모르지만, 그 방에는 꼭 있어야 할 그것이 없고, 그 분 역시 계시지 않는다.”

 

고든 피(Gorden Fee)교수는 “현대 기독교는 ‘부와 건강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그 속에 복음의 특성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악성 질병에 빠르게 감염되고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표현은 고상하고 세련되게 하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결국 믿음도 부와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하나님도, 내 건강과 내가 잘사는 것보다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 이 악성질병의 증상입니다.

 

우리의 주의가 필요한 것은, 이런 ‘믿음이 아닌 것’이 믿음인 것처럼 위장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고, 건강한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믿음이란 예수 믿고 부자 되고 출세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참된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제3차 포로귀환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B.C. 459년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제2차 포로귀환이 있었고, 13년이 지난 아닥사스다 제20년에 왕의 술관원 이었던 느헤미야가 포로에서 귀환하는데 이것이 제3차 포로귀환입니다.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보다 깊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어 부자 되고, 출세하고, 잘 사는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1. ‘보다 깊은 믿음’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줄 아는 믿음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행복과 부와 건강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세계 최대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관리였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그는 왕의 술관원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왕의 술관원은 왕의 생명과 관계된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독살이나 암살이 많았던 고대 사회에서 왕이 마시는 술과 음료를 관장하는 일은, 왕이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신임하는 자가 맡는 직책이었고, 왕의 인장까지도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느헤미야는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어느 날 그 권력의 중심부에서 자진해서 내려오고, 왕에게 자신의 목숨을 건 위험한 말을 아룁니다.

 

2장에 보면, 느헤미야는 왕에게 수심에 찬 얼굴로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첫째,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과, 둘째, 무너진 조상들의 성읍을 재건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하여”(느2:2) 왕께 대답하였는데, 그가 ‘크게 두려워한 이유’는 그 말이 왕이 이전에 내린 조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의 대적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대해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글을 올려, 반역을 이유로 성읍 건설을 반대했었습니다. (스4:7 이하) 이에 아닥사스다 왕은 옛 기록들을 참고하여, 예루살렘 성읍의 재건을 금지하는 조서를 내렸었습니다. (스4:23) 그런데, 지금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그 성읍’을 건축하게 해 달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반역의 이유로 금지시킨 일을 다시 언급한 것이고, 왕의 조서가 내려진 사안에 대해서 왕의 뜻에 반하여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부와 성공의 복음에 빠져 있었다면, 느헤미야는 이런 위험한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왕의 술관원이라는 자리를 버리고, 수도에서 1500km 떨어진 변방으로 가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와 성공의 복음의 중심에는 ‘자아’라는 우상이 있습니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데이비드 라센(David L. Larsen)교수는 오늘날 얼마나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권위의 황혼기와 그에 따른 진공상태에서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역(逆)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보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현대인들이 인간이 지구의 중심이라고 다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깊은 믿음’은,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대접받고,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내가 무엇이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를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나를 버리고, 나의 이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보다 깊은 믿음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보다 깊은 믿음’은 ‘교회-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느헤미야는 개인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예루살렘과 그 땅의 백성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1500km 떨어진 고국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고국의 형편을 들었습니다. 동포들은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그 성문을 불탔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4절)

 

느헤미야는 포로출신으로 자신이 거대한 제국의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며, 자랑하는 데서 그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출세하고 성공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을 자랑하는 부와 성공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교회-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웠습니다. 느헤미야 13장에 보면, 느헤미야가 단순히 벽돌을 쌓아 올린 재건의 건축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새롭게 한 인물임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는 이방인 도비야가 사무실처럼 쓰고 있던 성전의 방을 정결하게 하였으며, 당시 지켜지지 않았던 예루살렘의 안식일을 지키게 하였고,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까지 행하였던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정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새롭게 하였고, 이 일에 자신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기꺼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3. 하나님은 이 믿음에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새 은혜를 주십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성공과 자기만족에 신앙의 목표를 두면, 그 사람은 평안할 때 절대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는 힘이 빠진 기도요, 축 쳐진 기도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믿음은, 평안할 때도 기도할 마음이 생기고, 그의 기도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시고, 새 은혜를 주십니다.

 

심리학 용어 가운데,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이나 이익만을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남을 돕는 사람의 행복지수가 훨씬 더 높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빈곤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이 축복과 성공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부와 성공의 복음, 부와 건강을 목적으로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이유 가운데 일부는, 이런 우리의 이기적이고, 부와 성공의 복음에 머물고 있는 모습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가 위기 상황에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성문을 불타고, 성벽은 무너져 내려 있고, 하나님의 공동체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상실한 상태에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넘어서서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울 이 시대의 느헤미야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다 깊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느헤미야처럼, 자기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과 교회를 사랑하며, 헌신하는 성도들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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