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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1902-1920) 순국자, 독립운동가(병천 3·1운동)③
최상도(호남신학대학교 교수(역사신학), 장로교역사학회 서기)
 
편집부   기사입력  2019/11/29 [10:37]

1919년 6월 30일 열린 경성복심법원 상고심에서 공소는 이유 없음으로 기각판결을 내리자 유관순은 일제의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면서 재판정의 걸상을 집어던지는 등 항거한 끝에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우국지사들과 이화학당 학생들인 어윤희, 박인덕, 이신애 등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유관순은 이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전개된 이 옥중 만세운동에는 함꼐 수감되어 있던 일반 범죄자들도 합세하여 만세 소리가 모화관, 냉천동, 애오개, 서소문 일대로까지 번져나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수감된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문을 당했는데, 이로 인해 유관순은 방광이 터지고, 이신애는 유방이 파열되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고문으로 유관순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으며, 결국 1920년 9월 28일, 만 18세의 꽃다운 청춘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다 

유관순의 사망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학장 프라이(Ms Lulu E. Frey)와 교사 월터(Ms Althea J. Walter)는 가족을 대신하여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처음에는 시신 인도를 거부했던 일제는 프라이 학장 등의 항의로 시신을 인도했다. 이때 유관순의 친척인 유빈기와 유중영 부자가 참관하였다. 시신은 실로 처참한 상태였다고 한다. 시신을 인도받은 프라이 학장은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만든 수의를 입히고 가슴에 성경을 안겨 주고 입관했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러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하에서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시신이 없어지게 되었다.

 

행방과 행적을 알 수 없게 된 유관순은 해방을 맞이하여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을 가르쳤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했떤 박인덕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인덕은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을 만나 유관순을 소개하여 이화여고를 중심으로 1947년 8월 ‘순국처녀 유관순 기념 사업회’를 조직하여 유관순의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기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유관순에게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이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기념사업회는 1989년 10월 12일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했다.

 

또한 이화여고는 1967년부터 지령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성경학교와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이화여고 개교 80주년을 맞아 지령리에 유관순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1967년 11월 11일에 유관순 기념교회인 매봉교회를 준공하여 유관순의 신앙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새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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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29 [10:37]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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