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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1902-1920) 순국자, 독립운동가(병천 3·1운동) ②
최상도(호남신학대학교 교수(역사신학), 장로교역사학회 서기)
 
편집부   기사입력  2019/11/14 [15:51]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고등과 2학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유관순은 이 비밀결사대 일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숙사 뒷담을 넘어 탑골공원으로 달려가서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했으며, 3월 5일 학생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병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919년 3월 10일 일제가 휴교령을 내렸다. 이에 학생들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때 유관순도 고향 병천으로 돌아왔다. 유관순이 언제 귀향하여 어떻게 병천의 만세운동을 조직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일제의 ‘大正(대정) 8년 刑控(형공) 제513호’판결이유문을 통해서 유관순이 병천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유관순은 3월 13일에 고향 병천으로 내려와 부친 유중권을 위시하여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과 교회당에서 병천 만세운동을 기획하였다. 유관순은 20여일 동안 천안, 청주, 연기, 진천 일대를 다니며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음력 2월 그믐날 밤 동생 유관복, 조카 유제한과 매봉산 꼭대기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각 마을에서도 만세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봉화가 타올랐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장터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매봉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인원, 유관순 등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로 진입하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유관순은 대한독립에 대한 필요성을 토로했다. 선언식을 마친 약 3천여 명의 군중은 만세시위 행진에 나섰다. 이로 인해 일제의 헌병, 수비대와 충돌이 있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선두에 있던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총에 맞고 어머니 이소제는 칼에 찔려 사망했다고 한다. 일제의 폭압적 진압에 격분한 군중들은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반하여 일제에 항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일부 군중은 천안-병천 간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끊고,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점거하여 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은 병천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천안 헌병부대 유치장에 10여 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공주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부지방법원에서 유관순은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인명을 살상하지 않은 시위에서 5년 형을 선고받은 예가 없었다. 이로 인해 유관순과 조인원, 유중무 등이 치열하게 법정 투쟁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7세의 어린 여학생인 유관순이 조인원, 유중무 등과 같은 중형을 받았다는 것은 유관순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조인원, 유중무 등과 함께 유관순은 이에 불복하고 항고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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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14 [15:51]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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