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ㅣ칼럼 > 금주의말씀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법궤에 대한 책임 (역대상 15:25-28) 205호
전갑재 목사/공주중앙교회 원로
 
편집국   기사입력  2019/11/01 [15:40]
▲ 전갑재 목사 ▲공주중앙장로교회 원로     ©편집국

법궤를 언약궤, 여호와의 궤, 혹은 증거 괘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칭호로 사용된 것은 그만큼 법궤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당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전쟁에 나가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물을 밟으니 요단강물이 멈추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법궤를 다곤 신전에 가져다놓으니 다곤 신이 넘어지고 머리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신성시했고, 하나님의 임재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기럇여아림(대상13:6)에 방치 되어 있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기 위해 3만 명을 세웠고, 특별한 새 수레를 준비하고, 소도 선택했습니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웃사가 소를 몰고 갑니다. 악기를 종류별로 연주하고, 찬양을 크게 부릅니다. 한마디로 국가적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나곤(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가 뛰었습니다. 수레가 기울면서 법궤가 땅으로 떨어지려 할 때, 웃사가 순간적으로 법궤를 붙들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삼하 6: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축제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습니다.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그 귀한 법궤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붙든 웃사를 상을 주어도 모자랄 판에 하나님께서는 웃사가 잘못했다며 그 현장에서 웃사의 생명을 거두었습니다. 웃사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왜 이토록 무섭고, 두렵고, 불행한 일이 벌어졌는가? 당시의 법궤를 오늘날 교회로 보고 말씀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언약궤는 반드시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웃사가 죽은 것은 수레 때문도 아니고, 소 때문도 아닙니다. 어깨에 메어야 할 법궤를 수레에 실은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대상 15:13절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언약궤를 어깨에 메지 않고 수레에 실었다는 것은 세속주의나 편리 주의를 의미합니다.

 

현대교회가 점점 하나님의 궤를 내 어깨에 메겠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편리주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도 노임을 주고 일하는 사람을 고용하자고 합니다. 현대 교인들의 특징은 교회에서 회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벼운 짐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일을 피해갑니다.

 

마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소욕대로, 인간적 본능대로 살려고 합니다. 또한 자기 성질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분쟁, 시기, 분냄, 분열, 투기, 미움, 탐욕이 여전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좋을 대로 살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신자 생활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신자이기 때문에 먹어서 안 될 것이 있고, 가고 싶어도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고,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욕심을 내서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감투가 아니라 가시관입니다. 평탄한 길이 아니라 골고다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라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때로는 원치 않는 손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만도 엄청난 은혜인데, 나 같은 것을 선택하시고 교회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연적 부름도 아니고, 맹목적 부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안에 나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소명을 받은 우리는 당연히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러서 보냅니다. 부름은 구원을 위해서요. 보냄은 상급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몸이라면, 사명을 주실 때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면 나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기회가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가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시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문지기는 하찮은 직입니다.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3D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전의 문지기는 대통령직보다 장관직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즉 직장이나, 술집이나, 영화관이나 이런 곳에서 천 날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루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주일 중 한날인 주일날 교회 안에서 예배와 봉사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크리스천들은 일반적 삶을 위하여 교회 밖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교회 일을 등한 시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어디든 내가 사용되고 있다면, 귀한 일입니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가던 웃사는 죽었지만, 힘들지만, 땀은 흐르지만, 언약궤를 어깨에 메였던, 오벧에돔은 큰 복을 받았습니다. 대상 14:14 ”여호와께서 오벡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오벧에돔은 가드 사람입니다. 이방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인데도 복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궤를 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장로든, 집사든, 권사든 그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법궤를 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새 수레에 실으면 편하고, 쉽습니다. 어깨에 메면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도 어깨에 메는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회생이 싫다고, 수고를 마다하고 편리 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는 내가 안 한 것은 안 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누구든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팔짱 끼고 남 하는 일에 구경이나 하고, 비판이나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교회 앞에서나 좋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27)

궤를 맨 사람, 노래하는 자, 우두머리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에봇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레16:4 세마포 옷을 거룩한 옷이라 하였고, 지성소에 들어갈 때 세마포 옷을 입었고,(레16:23)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삼상2:18)고 했습니다.

 

목사는 목사의 옷을 입고 있어야 하며, 장로는 장로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목사다움, 장로다움을 말합니다. 목사 냄새, 장로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집사도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세속적 방법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던 습관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 오면 안 됩니다. 교사라고 학생 가르치는 식으로 당회장을 가르치려 하고, 은행원이라고, 수지를 맞춰야 한다고 수판 놓기 바쁘고, 노조원이라고 규탄하고 선동하고 무리를 지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하는 곳입니다. 계산해 보고 안 된다. 못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하는 곳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의 일이 있습니다. 누구든 월권해서는 안 됩니다. 장로는 장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목사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하는 자리가 아니라 협력하는 자리입니다.

 

교회가 사랑이라고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출 3장을 보면,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로 모세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방적으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새로운 신을 신기기 위하여서 일 것입니다. 부름 받은 순간부터 새로운 교회문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하거나 토한 것을 다시 먹을 수 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 갔습니다. 새 것에 적응해야 합니다. 

 

3.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28절).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뿔 나팔, 제금, 비파, 수금을 힘 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모두가 노래하는 자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노래하며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소에게 맡겨 놓고 편하다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어깨에 메고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노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즐겁게 할 때 일하면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능률도 오를 것입니다.

 

성경은 헌금까지도 즐겁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9:7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래서 출 35:21, 29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건축할 때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목숨처럼 귀한 물질들이나 하나님을 위한 일에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바울은 불행에 빠진 한 시람을 구하였다가 오히려 구타를 당하고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난무하는 감옥에서 바울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 드리며,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찬송은 옥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핑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벧에돔처럼 복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궤를 내 어깨에 메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저작권자 기독타임즈 ⓒ무단전재 공유언론사, 협력교회 및 기관 외 재배포 금지

대전충청지역 대표 기독교주간신문사 기독타임즈(kdtimes@hanmail.net)

발행인=오종영 목사 ㅣ 사장=장원옥 목사 ㅣ 사업본부장=이승주 기자 ㅣ 충청영업소=임명락 기자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9/11/01 [15:40]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