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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申錫九, 1875-1950) 목사, 독립운동가(3·1운동 민족대표) ①
김형석(경희대학교 역사학박사(Ph.D), 전 총신대학교 교수(전임대우)
 
편집부   기사입력  2019/10/07 [14:43]

의사 대신 선택한 전도자의 길 

신석구는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부친 신재기(申在綺)와 모친 청해(靑海) 이씨 슬하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호는 은재(殷哉)이다. 그는 어려서 사랑하는 가족을 연이어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7세에 모친을, 10세에 조부를, 12세에 양부인 백부를, 그리고 15세에 부친과 조모를 한 달 사이에 잃는 고통을 당했다. 9년 사이에 5명의 보호자를 잃은 탓으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19세 때 하류계층 유부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다행히 율곡의 《격몽요결》을 읽는 중에 마음을 다잡고 동거를 청산한 후 서당에서 훈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23세 때 여섯 살 아래 처녀와 결혼했으나 다시금 정신적인 방황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에서 군수 자제를 가르치기도 하고, 전당포를 경영하는 등 여러 형태의 삶을 살았지만 도저히 공허함을 달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조국은 나날이 기울어져서 현실에 안주할 수도 없었다. 이때 깨달은 것이 종교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이었다. 그때 신석구는 고향 친구 김진우와 고랑포교회 교인들의 3개월에 걸친 전도를 받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두 손을 들고 생각나는 대로 죄를 세어 보기 시작했는데, 그해 곧 33세부터 거꾸로 헤어 올라가 7세 당시까지 50여 가지 죄목을 손가락으로 꼽았다. 나는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기억되는 것이 이만치 많으니 이외에 잊어버린 죄가 또 얼마나 많을까?” 

-신석구 목사 사서전 중에서 

 

1907년 7월 14일 신석구는 “잃어버린 나라와 국민을 되찾기 위해” 개종을 결심하고 고랑포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고랑포교회를 출석한 지 달포가 지났을 때 개성에서 순행전도사 정춘수가 저녁 집회를 인도하러 왔다. 정춘수는 동향 친구로 어렸을 적에 각별한 사이였는데, 신석구에게 개성에 가서 새 일을 할 것을 제안했다. 정춘수를 따라간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은 의사인 리드 선교사의 어학선생이었다. 그리하여 의사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며 환자에게 전도하면서 수술을 돕는 새로운 생활에 보람을 느끼고 있을 때, 리드 선교사가 의학을 공부해 보라는 제안을 하자 의사의 길과 전도사의 길을 놓고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성경을 보다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각각의 직분을 주셨다는 구절을 보고 하나님께서 내게 목사의 직분을 주셨나, 의사의 직분을 주셨나 이를 알고자 하여 밤이면 산에 올라가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는데, 얼마를 계속하였는지 알지 못하나 하루는 성경을 보다가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 ‘마땅히 양심대로 행하라’하신 말씀을 보고 생각하기를, 내가 전도하려는 것은 남을 죄에서 건지라는 양심이요 의사가 되려는 것은 자선사업을 하라는 마음이 아니라 돈을 벌라는 욕심인데 양심은 곧 하나님의 주신 마음이니 양심의 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직분일 것이다.” -신석구 목사 자서전 중에서 

 

이렇게 전도자의 길을 택한 신석구는 개종한 지 8개월 만인 1908년 3월 29일 왓슨 선교사(A. W. Wasson, 왕영덕)에게 세례를 받고, 그해 4월 감리교 협성성경학원에 입학했다. 1909년 2월 개성 북부교회 권사로 목회하다가, 1910년 오화영이 전도사로 부임하자 동역하게 되었다. 오화영과의 만남은 후일 3·1운동 민족대표로 함께 참여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3·1운동과 민족대표 33인

개성 북부교회는 교인 수가 800명이나 되는 교회였는데 크램(W. G. Cram, 기의남)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고 후임 갬블(F. K. Gamble, 감보리)선교사가 부임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개성 북부교회의 ‘권사 목회’는 세례 받은 지 1년도 안된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중역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밤낮 교회에서 기도하며 지냈지만, 1910년 개성지방회의 전도사 면접시험에 떨어지는 시련을 겪자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 강원도 홍천읍교회로 부임했다.

 

1912년 전도사가 된 신석구는 홍천읍교회를 거쳐 1914년 경기도 가평구역으로 파송 받았고, 1915년 10월 춘천지방 순행전도사로 파송되어 전도사업에 종사했다. 1917년 9월 ‘집사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18년 11월부터 서울 수표교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개인적 신앙만이 아니라 국민계몽의 길이었고, 국권회복운동의 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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