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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尹致昊, 1864-1945) 개화파, 제1대 독립협회 회장 ②
김호욱(광신대학교 교수(역사신학), 기독교향토역사연구소 소장)
 
편집국   기사입력  2019/08/22 [16:23]

1890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윤치호는 조지아주에 있는 에모리대학에 입학, 캔들러 교수를 만난다. 그는 절약한 학비와 농장일 등으로 250달러를 모아 1893년 3월 조선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편지와 함께 캔들러 교장에게 전달하면서 “이것을 조선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할 기금으로 삼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윤치호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캔들러는, 코카콜라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자신의 형 아서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동생으로부터 윤치호와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아서 캔들러는 윤치호가 건넨 돈의 10배의 금액을 남감리회에 선교헌금으로 기부했다.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미국 남감리회는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남감리회 선교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던 윤치호는 학업을 마치고 1893년 10월 하순 중국으로 돌아왔다.

 

상해 체류 중 남궁억을 만나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가사를 넣었다고 전해진다.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직까지 미상으로 남아있으나 윤치호와 안창호 중 한 사람으로 집약되고 있으며, 작곡자는 안익태이다. 

 

조국의 복음화운동과 개화운동 

윤치호는 고국을 떠난 지 10년 만인 1895년 2월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 즉시 자신의 집안에서 부리는 노비들을 석방시켰다. 또한 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줏단지를 불태우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애턴 캠밸이 교화와 학교 부지를 찾지 못할 때, 그는 아버지 윤웅렬을 설득하여 땅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윤치호는 민중들의 의식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독립협회의 회장일 때인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했다. 1898년 5월에는 〈독립신문〉 사장 겸 주필을 담당하였다. 독립협회가 1898년 12월 정부로부터 강제 해산 당한 후 한성부판윤 겸 한성부재판소 수반판사에 임명되었다가 견제 세력들에 의해 다음 해 1월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으로 전임되는 등 1903년 말까지 외직 생활을 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그를 중앙정부로 불러 외무협판과 외무대신 서리에 기용하였다. 윤치호는 외무협판으로 하와이와 멕시코에 있는 한인 이민자 실태를 파악하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대한자강회 회장(1906년 4월), 한영서원(韓英書院) 원장(1906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1906년 12월), 기호흥학회 교육부장(1908년 3월),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의 회장(1908년 5월), 평양대성학교 교장(1908년 9월), 청년학우회 회장(1909년 2월) 등 다양한 활동으로 민족 복음화와 개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윤치호의 삶은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기독교 신앙인 이전의 삶과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삶으로 대별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윤치호에게는 다른 인물들과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그의 삶이 한일합방 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민족 계몽과 복음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친일적 행보다. 그의 삶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했다.

 

운치호가 친일적으로 전향한 것은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는 가혹한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르고 나오던 1915년 친일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이후부터 그는 새문안교회의 건축 공사비에도 거액을 헌금하는 등 기독교 복음운동을 활발히 벌이면서 조국의 독립운동과 함께 친일 행보를 걷기 시작했고, 점차적으로 친일 행보로 삶의 무게 중심이 기울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저서로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이 있고, 역술서로 《찬미가》, 번역서로 《의회통화규칙》, 《이솝우화》, 《걸리버여행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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