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위하여/버리고/용서하고/참고/다시/아름다움을 위하여/무엇인가를 만든다//진실한 것/참된 것/마침내/영롱한 빛을 뿜으면/나는 더 이상/없어도 좋다/
압구정 지하철역에서 나의 친애하는 고교동창 유 자효시인의 이 아름다운 시를 만났다.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그의 시가 뿜어내는 영롱한 빛에 내 영혼은 아연 실색했다.
시인은 더 없어도 좋다는 자기 자신을 이미 탈곡해버리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 영혼은 광야에서 외롭게 묵은 때를 겹겹이 두르고 이렇게 압살당해가고 있는 것인가. 내 속에서 꿈틀거리며 용서하지 못하는 산맥같은 증오의 덩어리는 도대체 어디서 솟구쳐 올라오는 마그마인지. 그 어떤 세탁액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절망감은 끈적거리는 싯딤의 역청처럼 내 영혼을 끝까지 갈구는 것인지. 이른 아침부터 낙하산 줄 같이 질긴 내 욕심이 증오와 절망과 한 덩어리가 되어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씨름판이 벌어졌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하나님도 그러신듯하다.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움이 얼마나 충만한지 세상 만물을 황금분할이 되는 비율로 만드실 뿐아니라 정확하게 오차없이 만드셔서 우리를 태양의 열에 태우지도 않고 얼리지도 않는데.
이렇게 정확하고 아름다운 분이 우리 인간을 만나시면서 시련을 겪는 아이러니를 보라. 하와의 실수, 가인의 살인, 악의 번성과 노아심판까지라도 주님이 당하신 증오와 좌절과 절망감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이것이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그토록 믿었던 노아 가족의 후손에게서 니므롯같은 천하에 못된 놈이 나와 아예 조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하였으니 그때부터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대치를 벗어나 근심꺼리가 되어버렸다. 이후로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또 배신당하시고 실망하고 후회하다가 오죽했으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하고 탄식하셨겠는가.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망나니같은 아들의 행패에 어찌할 수 없이 말없이 쳐다만 보는 늙은 애비의 모습이다. 은하계 속에 있는 1000억개의 별들의 운행을 1인치 오차도 허용하시지 않는 하나님, 또 그런 은하계를 1000억 개나 만드셔서 일일이 다 파악하고 계시는 하나님, 나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수소 핵융합 반응에서 나오는 빛을 지구위의 식물의 엽록소에서 그 광파장을 조준하여 물을 화학분해하고, 축전배터리로 에너지를 축적하고 탄소동화작용을 시키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그냥 말씀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지구 위 인간세계도 불가사의의 연속이다. 예체능계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한국의 젊은이들, 손흥민, 류현진, BTS, 봉준호 같은 수퍼 코리언 4대 天王이 있는가 하면 아픔과 억울함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전역을 얼마두지 않는 해군 병사가 뜻밖에 튀는 홋줄에 맞아 즉사하는 곳이고, 부다페스트에 놀러가 요한 스트라우스2세의 푸른 도나우의 왈츠곡에 취했다가 하필 그 도나우 강에 빠져 참변을 당하는 곳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만에 파송되었던 어느 선교사가 젊은 부인을 남겨두고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는 초 비극 앞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유족을 나무랄 사치를 누릴 수가 없다. 이런 드라마 같은 실존의 삶 앞에 누가 감히 자기의 원통과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을 것인가. 착하다고 부귀와 장수를 누리는 것도 아니며 악하다고 단명하고 비루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다 빛과 어둠속에 다닐지라도 그 당하는 일이 결국은 같은 것이다. 나의 아픔과 괴로움에 너무 집착하지말자. 참기 힘들거든 멀리 놓고 보자. 그리고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 예수를 집중하여 바라보자. 누가 그랬던가. 아프니까 인생인 것이고 매운 맛도 진미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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