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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십자가, 진리와 빛으로! (고후13:4~9) 194호
채영남 목사/광주 본향교회
 
편집부   기사입력  2019/05/24 [16:30]
▲ 채영남 목사/광주 본향교회     © 편집부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우리에게 익숙한 노랫말입니다. 가깝게는 지난 2016년 가을 시작된 촛불시위가 이십여 차례 진행되면서 자주 불렀던 노래입니다. 시위에서 애창되었기 때문에 불온한 노래로 생각한다면 오판입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왕정에 대항한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주요 장면에 등장하는 노랫말입니다. 1862년 대문호 빅토르 위고에 의해 탄생한 이 소설은 뮤지컬로, 그리고 영화로 우리에게 익숙하며 친숙합니다. 노랫말 하나하나는 당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인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주체들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회의 악에 대항하는 자리에는 항상 이 노래가 어느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왕정을 몰아내고 자유와 평등, 박애의 이념을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어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이념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넘어서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39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인 5.18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자유와 평등, 박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현대사에서 모든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진상규명 요구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힘의 원천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속으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한 5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5월은 마주하기 불편한 계절입니다. 아직도 매년 5월이면 가슴에 통증이 찾아옵니다. 1980년 1월 지금 섬기는 교회에 부임 후, 교회 근처 극락강 저편의 광주소식을 사람들 입과 입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듣고 있어도 믿겨지지 않는, 그래서 입을 다물기 어렵고 손발이 떨리는 이야기들을 TV나 신문에서는 단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가 막혔습니다. 총소리는 군부대의 훈련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교회와 가까운 군 공항에 오르내리는 전투기들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의 열흘,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의 고민과 생각보다도 죽음의 문턱에서 한 손에는 성경책을, 한 손에는 약봉지를 들고 힘겨운 숨을 내쉬어야 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교회 앞마당에 나가 저 멀리 보이는 무등산 자락 아래 자리 잡고 있는 도청 소재지를 보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980년 6월 2일. 당시 전남고등학교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의 ’아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가 전남매일 신문 1면에 게재됩니다. 이날 공식적이면서도 처음으로 매체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사태를 수습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에 가깝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처음 보게 됐습니다.

 

‘아 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 아 온 몸에 상처뿐인 죽을 뿐인 하나님의 아들이여!’광주의 5월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여인들처럼, 숨어서 예수님의 수난을 바라보다 살기 위해 예수님을 부정해야 했던 제자들처럼 고통스러운 계절입니다. 벌써 39년이 지났습니다. 어떻습니까? 변했습니까? 자유와 평등,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까? 39주년을 기념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앞에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자신이 설립한 교회 고린도 교회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참 진리이신 예수님보다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다른 복음을 퍼트리는 거짓 사도들을 떠오를 때는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힘든 분노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 하나의 복음, 진리가 왜곡되는 것에 치욕과 분노도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마주한 20세기 전인 AD55년경이나 우리가 겪고 있는 2019년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놀라움보다도 불편함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맞습니다. 불편함입니다. 5.18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마음의 부채로 인한 불편함이요, 갖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불편함입니다. 저 역시도 매년 5월은 마음의 부채로 잊고 지냈던 통증이 언제나 찾아옵니다. 80년 당시 병약함으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육신의 질병 가운데서도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였지 않느냐는 변명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잘했다 못했다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오직 진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랐던 믿음의 동역자들, 성도들을 마주할 때마다 불편합니다. 마음의 빚은 빛으로 살아간 이들을 보며, 마치 예수님의 무덤을 막아 놓은 커다란 돌보다도 더 큰 무게로 짓누르며 힘겹게 합니다.

 

2019년 5월을 보내며, 오월은 십자가라는 것을 크게 느끼게 됩니다. 치욕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짊어져야 기쁨과 영광의 길을 열 수가 있습니다. 죽음의 십자가에 달려야만이 생명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돌무덤에 장사되어야 만이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39년이 흐른 오늘, 오월의 십자가는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직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습니까? 죽음의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까? 돌덩어리로 막힌 돌무덤에 갇혀 있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날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임한 후, 권세와 능력을 행하는 제자들로 인해 복음의 외연은 더욱 확장되고 견고해졌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가장 앞장서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그러함에도 믿지 않는 자들은 여전히 오만함 가운데 복음을 경멸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시대뿐만 아니라 2천년이 지난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성도나 믿지 않는 자나 변함이 없이 진리를 진리라 믿지 않습니다. 진리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언제든지 왜곡하거나 변질해 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역사에서 부정할 수 없는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바울이 마주한 불편함, 어법에 맞지 않지만 이를 거룩한 불편함이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 또 이와 반대되는 불편함을 세상적 유익의 불편함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월의 십자가 앞에 불편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불편함과 자기유익을 위한 불편함이 대립되는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과제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지혜를 덧입혀 주시고, 능력을 허락하시며 진리와 빛으로 나아가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한 것이 강하다는 격언에서와 같이 역설적인 상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실히 밝혀집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바울이 표현한 약함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자하나님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거나 무능력자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여정에 철저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예수님 자신을 통해 나타내실 수 있도록 맡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루우린 토우어는 “나의 하나님은 모든 능력이요 그는 언제나 나를 지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80년 당시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나갔습니다. 모두가 어려움을 겪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위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광주시민 뿐만 아니라 계엄군에서도, 다른 지역에서도 기독인들은 두려움을 뒤로 하고 나아갔습니다. 고 문용동 전도사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당시 전남 도청 지하실 무기고에는 2,500여정의 총기와 폭약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폭발하게 되면 반경 3-4km 이내를 파괴하게 될 위험이 존재했었습니다. 문 전도사님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폭발물 뇌관을 분리 작업했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순교했습니다.

 

또 계엄 하에서 광주의 치안을 책임지던 31사단장 정웅 장로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정웅 장군은 서울 중앙성결교회 안수집사셨습니다. 신군부는 강경진압 뿐만 아니라 무장헬기와 전차를 동원해 진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명이 만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에 순종해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정 장로님은 이 일로 사단장에서 해임됐고 군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 광주시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광주사단장으로 가게 하셨다고 간증했습니다.

 

부산제일교회 임기윤 목사님도 신군부의 만행과 5.18의 진상을 강단에서 설교하시다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으셨다가 일주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얼마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광주주월교회 방철호 목사님은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상무대에 구금돼 있던 시민을 구해 오시기도 하고, 기독교비상구호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켜 당시 민주화운동기간 입원해있던 시민들을 방문하여 보살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엄군이 입원해 있던 통합병원에도 방문해 그들을 위로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었습니다. 광주시 양림동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교사의 선교활동이 활발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계엄군이 양림동에 대해서만큼은 우호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푸른 눈의 기독 외국인들의 역할도 지대했습니다.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이었던 허철선 목사님은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는 사역에 생명을 걸고 임했습니다. 피터슨 선교사님도 시민을 향해 헬기에서 발포한 사진을 통해 진실을 알렸습니다.

 

영화 택시 운전사에 등장하는 위르겐 힌츠페터가 숨어 지냈던 곳이 양림동 선교사 사택입니다. 그야말로 양림동은 구약에 나오는 도피처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독인들은 5.18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믿었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와 저주의 상징,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와 같은 폭도의 굴레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5.18 국립묘지를 보십시오. 잠들어 있는 묘지의 20%가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름 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5.18은 진행형입니다. 여전히 거룩한 불편함과 자기이익을 위한 불편함이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약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능력으로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을 통해 진리와 빛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더욱 참 진리로 빛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믿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고린도 성도들은 끊임없이 바울의 사도권을 시험해왔습니다. 정당하고도 바른 시험이 아니라는 점을 누구나 다 아실 것입니다. 바울의 화려한 배경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권위가 불편했습니다. 그들의 시험 앞에 바울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믿음에 있는지 확증하라”, 증명해 보아라고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바로 서 있는지 항상 자신을 시험하는 방법이야말로 오월의 십자가를 진리와 빛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바울이 말한 본래적 의미인 믿음은, 믿음의 순수성을 되돌아보면서 믿음에 방해되거나 왜곡되거나 변절되거나 위배된 것을 제거하고 정제해 나가가야 한다는 것을 품고 있습니다. 만약 참 진리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품지 않는다면, 버림을 받은 자라고 경고합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 말씀과 상통하는 부분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십자가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여러 가지의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은 불순한 의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마주한 오월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이면서도 사적이거나 집단이해를 위해 포장된 진리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참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거짓 진리일 뿐입니다. 문제는 거짓이 진리의 우위에 설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믿음에 기반 하지 않은 진리는, 다시 말해 관행적이거나 의무적으로 이해한 자기중심적인 진리는 결국 버림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월의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오늘 믿음에 있는지 항상 시험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진리를 왜곡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두 번째는 오직 진리를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8절과 9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영국 속담에 십자가의 그늘에 악마가 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장으로 본다면, 악마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모습으로 숨어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추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 형성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지요.

 

우리가 마주하는 오월의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자가 아닌 오직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의 존재 이유인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80년 당시 기독인들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보편적 상식이나 이해를 뛰어 넘었습니다. 아직도 논란이 있습니다만, 계엄군의 폭력과 살생, 그리고 발포가 시민이 자위권 행사를 위해 무장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세상적 이해와 상식은 옳은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기독인들은 복음 앞에 시민의 무장이 옳은지를 기도했습니다.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한 위원의 상당수가 기독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속한 수습을 위해 무기반납을 이끌어냈습니다.

 

광주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중요한 사례 중의 하나가 무기 반납입니다. 이미 무장한 단체가 스스로 해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국가의 치안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 단 한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도 높게 평가합니다. 이를 두고 도덕과 양심지수가 높았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를 더하자면 지도부와 시민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입니다. 기독인들은 오직 진리를 위해 나아갔습니다. 비폭력 저항이 진리를 바로 세우고, 빛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믿었습니다.

 

8절 말씀의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는 바울의 신념과 상통하는 부분입니다. 자신의 행동과 처신 자체가 진리에 근거한다는 자신감입니다. 사리사욕은 진리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무장 저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정당하고 바른 일이라 할지라도, 살생을 하며 관철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하는 길인지를 고민한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 위에 설 수가 없는 법입니다. 행위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나아갈 때에만이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진리 안에서 강하게 될 때에 약함은 오히려 강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진리를 위해 한 없이 약해진다 할지라도, 믿음이 강해진다면 그것이 참된 강함이요, 결국에는 헬라어 ‘카타르티조’가 번역된 온전함을 이루게 되는 법입니다. 온전함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회복이 됩니다. 화해와 협력, 평화와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월의 십자가는 불편함입니다. 그 불편함이 우리의 연약함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자기유익의 불편함이 진리의 불편함을 억압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오월의 십자가 앞에서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참 진리와 거짓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딤후 2장 15절 말씀처럼 진리를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그 진리는 오직 하나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치욕과 저주, 죽음의 십자가와 함께 죽으심과 같이 우리도 죽어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와 빛으로 말입니다.

 

김준태 시인은 그의 시 마지막 연에서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 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가는 청춘의 도시여’ 라고 적고 있습니다. 오늘 마주한 오월의 십자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진리와 빛으로 나아가며, 자랑스러운 3.1운동과 4.19, 5.18과 87년 6월 항쟁을 잇는 민족의 동반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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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오종영 목사 ㅣ 사장=장원옥 목사 ㅣ 사업본부장=이승주 기자 ㅣ 충청영업소=임명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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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24 [16:30]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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