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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徐相崙, 1848-1926) 전도인(한국성경 번역, 한국최초의 권서) ①
임희국(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교회사 및 신학사상사))
 
오종영   기사입력  2019/05/10 [17:06]

홍삼장수가 권서가 되다 

서상륜은 1848년 평안도 의주에서 서석순(徐奭淳)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동생으로는 서상우(경조)가 있었다. 일찍이 14세에 부모를 여의고 동생 경조와 함께 만주를 드나들며 홍삼 무역을 했다. 그러던 중 서상륜은 1878년에 영구(營口)에서 열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의주 친구들,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 의료선교사 헌터(J. M, Hunter)의 도움과 치료로 회생하였다. 병중에 이미 매킨타이어에게 복음을 받은 바 있던 서상륜은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자인 선교사 로스(John Ross, 나약한羅約翰 1842-1915)를 ‘섭리적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로스는 의주에서 온 이응찬 등과 함께 요한복음, 마가복음을 번역하였으나 이응찬이 어쩔 수 없이 의주로 돌아가게 되면서 번역을 중단한 상황이었다. 로스는 서상륜을 한국어 선생 겸 번역인으로 채용하여 누가복음 번역을 맡겼다. 이후 의주로 돌아갔던 서상륜이 다시 합류하여 누가복음 번역을 수정하고 인쇄하는 일을 도왔다.

 

그의 본격적인 활약은 세례를 받고 권서로 임명된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 서상륜은 영국성서공회의 첫 번째 권서로 임명되었고 ‘함께 엎디어 주께 도와주시며 보호하심을 기도’한 후 의주를 향해 떠났다. 의주의 신자들과 구도자들이 계속해서 성경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쇄국정책을 시행하던 조선과 청을 유일하게 잇는 곳이 고려문이었는데, 서상륜은 거기서 세관 검사관에게 지고 있던 모든 성경을 압수당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세관 검사관이 의주로 직접 찾아와 성경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서상륜은 의주와 그 주변에서 성공적인 권서 활동을 마친 뒤 남은 성경을 들고 서울에 ‘잠도(潛到)’했다.

 

로스는 성경을 더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서상륜에게 성경을 보내게 되는데, 1883년에는 평양 권서로 활동하게 된 류춘천 편에 한 상자를, 1884년에는 약 천 권을 전달한다. 1884년의 사건은 제물포 해관 사건으로 유명하다. 로스는 당시 외무아문협판인 묄렌도르프의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제물포로 들어가는 책을 서상륜에게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제물포 해관이 성경 상자를 발견하고 압류했으나 아내의 부탁을 받은 묄렌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러 사정을 듣고서 압류된 성경이 그에게 전달되도록 중재를 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달된 복음서를 들고 펼친 서상륜의 권서 활동은 서울에서 많은 신자들을 만들어냈고, 1885년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서울에 이미 복음의 씨앗이 많이 뿌려져 자라고 있음을 보고 놀랐다. 

 

서경조와 황해도 장연군에 소래교회를 세우다 

서상륜이 의주에서의 권서 활동을 마감할 즈음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고향 의주를 떠났다. 서상륜은 권서 활동을 위해 서울로, 서경조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동(松川洞)에 터를 잡았다. 여기에서 1883년부터 1884년 사이에 ‘소래교회’가 시작되었다. 형 상륜과 함께 이미 매킨타이어의 전도를 받은 바 있고 성경 번역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한 바 있던 동생 경조가 개종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1885년 초에 세례청원자가 20명을 넘기게 되었다. 1885년 3월 서상륜은 만주 봉천(심양)을 방문하여 로스에게 소래의 20명을 포함하여 70여 명의 세례청원자가 있음을 보고하며 조선을 방문하여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당시 고려문의 상황은 더 나빠져서 로스는 조선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입국하여 소래에 머물면서 1년 이상 그곳 교인들을 지도하던 서상륜이 이번에는 1886년에 서울로 와서 언더우드 등을 만나 소래에 있는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지속되자 마침내 그는 1887년 1월에 소래교회의 교인들 4명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것도 적지않은 여행경비와 숙박비 일체를 스스로 부담하면서였다. 소래에서 온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이 3명은 ‘목숨을 걸고’ 1887년 1월 23일에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그해 가을에는 마침내 언더우드가 소래로 가서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때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가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개신교 최초의 유아세례 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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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10 [17:06]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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