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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진 목사(1868-1939) ‘한국교회의 바나바’ ②
최상도(호남신학대학교 교수(역사신학), 장로교역사학회 서기)
 
오종영   기사입력  2019/03/02 [15:51]

한석진의 이와 같은 자주, 자강의 주체의식은 선교사-조사간의 평등을 강조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선교사들의 안식년을 한인 목회자들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실현에서 볼 수 있다. 1896년 마펫 선교사가 안식년을 얻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의 조사로 섬기던 한석진 역시 평양을 떠나 소우물(현 장천)로 들어가 안식하며 그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한석진이 강조한 자주, 자강의 주체적 교회 설립 원칙은 장대현교회, 서울 안동교회, 마산 문창교회, 신의주제일교회 건축과 금강산 기독교수양관 건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되다 

한석진은 1903년 6월 24일 자신의 안식년 때 개척한 소우물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고 그해 9월부터 장로회공의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904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신학을 수학한 후 1907년 6월 20일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독노회가 창립될 때 한석진은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길선주와 함께 장로교 최초 목사가 되었다. 또한 한석진은 독노회의 서기로 피선되어 노회를 섬겼으며, 5년 후 1912년 9월 1일 장로교 총회가 창립될 때 총회 서기로 피선되었다. 이듬해 제2회 총회 때 한석진은 부총회장으로, 그리고 1917년 9월 11일 제6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교회를 이끌었다.

 

한석진은 자주, 자강의 주체적 지도력을 노회나 총회의 임원이 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실현했다. 정성한 교수는 〈한석진 목사의 목회 리더십〉[《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리더십》(쿰란, 2010)]이라는 연구에서 “한석진 목사는 한국교회를 통해 한국 국민들이 자치 능력을 길러 국제사회에 우뚝 섬으로써 세계 종교문화의 큰 조류에 같이 참여하게 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주체적 지도력은 특히 1925년 12월 28-29일에 서울 조선호텔에서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 Conference, IMC) 회장 모트(J. R. Mott)가 내한하여 열린 ‘한국교회 지도자 초청 간담회’에서 두드러졌다. 한국 대표와 선교사 대표 각각 31명이 모인 이 모임에서 한석진은 한국교회의 자주성과 기독교 토착화를 날카롭게 주장하였다.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다 

한편 한석진의 자주, 자강의 지도력은 교회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가 마펫 선교사의 조사로 복음 전도에 전념할 때 그는 동시에 1896년부터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에 의해 설립된 독립협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한석진은 협회의 관서 지부장으로 평양지회 조직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 민족운동 세력을 규합하여 독립협회 조직을 성장시켰다. 1898년 9월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회 회관 설립을 추진하였고, 평양 대동강 서편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최하여 도산 안창호의 유명한 ‘쾌재정 연설’도 주선하였다. 또한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한석진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또한 1919년 3·1운동 당시 한석진은 마산교회를 담임하였는데, 3월 3일부터 시작된 마산의 만세운동 주동자들 대부분이 마산교회 교인들이었다. 이 만세운동에 한석진이 적극 가담한 흔적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자주, 자강의 설교는 교인들로 하여금 일제의 억압에 고통당하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게 했으며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석진은 1909년 자로교 독노회에 의해 일본 유학생을 위한 일본 선교사로 파송받아 1909년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 활동하면서 동경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동경한인교회’라는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설립하고 돌아왔다. 1883년 이수정이 동경에서 세례를 받고 형성한 유학생 중심의 신앙공동체가 1909년 한석진에 의해 부활하였고, 동경YMCA와 더불어 이들은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역이 되었다.

 

한석진의 역사적 위치를 살펴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나바가 연상된다. 바나바는 12사도 중심의 예루살렘과 바울 중심의 안디옥을 연결한 중재자이다. 바나바의 매개로 안디옥과 예루살렘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갔고, 신생 안디옥교회는 새로운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한석진은 선교사 공동체와 자생적 한인 신앙공동체를 적극 매개하여 선교사가 선교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헌신한 중재자였으며, 한인신앙공동체의 자주, 자강의 주체성을 확립하여 선교하는 교회로 서도록 그 기초를 마련하였다. 한국교회 지도력의 위기가 논의되는 시점에서 그를 한국의 바나바로 평가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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