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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인가, 바다인가? 188호
김진규 장로 / 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장,대전산성교회
 
오종영   기사입력  2019/03/02 [15:50]
▲ 김진규 장로 ▲공주대 명예교수     ©편집국

갈릴리 호수인가, 갈릴리 바다인가? 이 말은 너무도 오래 된 질문이라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확실한 답을 모른답니다.

 

얼마 전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거쳐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마치 성서 속을 거니는 감동을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갈릴리에서 1박을 하며 밤바다에서 그 옛날 제자들처럼 배도 타보면서 갈릴리가 배경인 찬양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바닷가를 산책하며, ‘갈릴리 호수인가, 바다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갈릴리 호수의 둘레는 55km,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2km, 면적은 160km2, 가장 깊은 곳이 44m라고 합니다. 길이나 면적으로 보아 호수의 규모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에도 이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은 세베대의 두 아들, 시몬과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셨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기적을 베푸신 곳이기도 합니다. 사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갈릴리 호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에는 ‘갈릴리 바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요6:1-2)

 

이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게 됩니다. 이런 표현을 두고 어느 성경학자는 ‘사도 요한이 갈릴리 벳세다 사람으로 바다를 볼 수 없었던 탓에 넓고 풍랑이 자주 일어나는 갈릴리 호수를 보고 바다라고 표현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성경에서도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는 이유는 현대에도 호수와 바다의 정확한 넓이 규정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올해에도 ‘호수인가, 바다인가?’의 문제가 카스피해(Caspian Sea)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는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라, 막대한 경제문제와 군사 정치 문제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카스피해에는 확인된 원유 매장량만도 약 400억 배럴로 전 셰계 매장량의 5%에 이르며, 잠재매장량은 2,600 억 배럴로 중동에 이어 세계 2위의 석유자원 매장지라고 합니다.

 

카스피해는 우리나라 남북한 국토의 1.5배가 넘는 면적(37만 1000km2)으로 둘레가 7000km의 해안선은 러시아, 이란,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5개국이 걸쳐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이란은 호수라고 주장하고, 다른 세 나라는 바다라고 주장한답니다. 만일 호수라면, 전체 면적을 5개국이 나누어 갖게 되어서 상대적으로 힘이 강한 러시아와 이란이 이 호수를 지배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다라고 정리가 된다면, 상대적으로 카스피해에 접경한 면적이 많고 15해리를 영해로 인정받는 세 나라가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인가, 호수인가’를 가지고 구 소련이 붕괴하면서부터 수십 년을 끌어오던 분쟁이 지난 해 2018년 8월 12일에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다섯 나라 대표들이 모여서 회담을 갖고 바다로 결정지었다고 합니다. 비록 15해리를 영해로 하고, 다음 10해리는 배타적 조업 구역으로 설정하는 애매한 조항이 있어서 강대국의 횡포 여지가 있다고 하지만, 강대국들이 주장을 내리고 바다라고 결정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갈릴리 호수인가, 바다인가’의 문제도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다인가, 호수인가의 문제는 보는 사람의 상황과 느낌인 것 같습니다. ‘호수냐, 바다냐’의 문제가 카스피해처럼 국가적인 재산이 걸린 문제라든지 심각한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부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따뜻한 주님의 말씀이 전파되었던 은혜의 동산에서 본다면 ‘호수’로 표현할 수도 있고, 무리 5천 명을 배 불리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위대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있었던 그곳 갈릴리였다면 ‘바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갈릴리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옛날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던 처음 신앙의 설렘과 감격, 사랑과 은혜의 산상수훈이 선포되었던 갈릴리, 부활 후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우리 마음을 적시고 있는가가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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