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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터키로 - 초대 신앙공동체의 숨결을 느끼다. ⑥
오종영 목사/영성교회, 본지 발행인,대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오종영   기사입력  2019/03/02 [15:33]

 

늘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었던 이스라엘과 터키를 경유하는 성지여행은 필자에게 큰 감동을 줬고, 시간은 흘렀으나 지금도 그 여운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그 때의 감동을 다시 되새기면서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을 통해 당시에 놓쳤던 감동을 다시 새기게 되어 감사할 뿐이다. 두 주간의 시간을 통해 내 마음의 욕심보따리에 꾹꾹 채울 수 있는 한계는 있었으나 성지를 눈으로 보고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는 감동과 활자를 통해 느껴야했던 성경속의 이야기와 눈으로 보고, 만지면서 느끼는 감동은 달랐다. 비슷하지만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던 많은 부분을 채워준 성지여행 이야기를 이제 정리할 시간이 된 것 같다. 다음호에서는 나머지 부분과 후기를 끝으로 성지 연재를 마치게 된다.

  

데린구유(2) 

지난 시간에 이어 데린구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이곳은 나에게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게으름에 대한 반성과 잃어버린 감사를 찾게 해준 고마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전에는 멜렌규뷰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고대 지하도시 위에 건설된 농경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 지하도시 주변에는 무덤들이 있는데 대부분 7세기의 것이라고 하며 데린구유는 약간 더 오래 되었다고 한다.

 

대규모 지하도시인 데린구유는 18층-20층으로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지금은 8층까지만 방문객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갑바도기아의 부드러운 응회암에 40미터 깊이로 세워진 곳이다.

 

이곳은 한때 아랍인들로부터 도피한 기독교인들이 거주한 곳으로 알려졌는데 내부 통로와 환기구가 지하 각층으로 연결돼 있고 교회와 학교, 그리고 침실, 부엌, 우물 등이 모두 배치되어 있다.

 

또한 적의 침입에 대비해 둥근 멧돌모양의 돌덩이를 통로마다 설치해 비상시 통로를 막았고 독특한 기호로 길을 표시해 외부에서 침입한 자는 길을 잃도록 미로처럼 여러 갈래의 통로를 뚫어 놓았다.

 

내려가는 길 입구의 바로 오른쪽에 있는 1층에는 가축사료를 위한 거푸집이 있는 마굿간이 있고 마굿간 바로 옆에는 포도를 짜서 숙성되도록 놔 두었던 방도 보인다.

 

이 방들을 지나면 원통형 둥근 천장이 있는 장소에 도달하는데 이곳은 예배를 드리는 종교의식을 행할 때 사용된 곳이다.

 

그리고 2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의 양쪽으로는 방들이 만들어져 있는데 미로처럼 복잡하게 되어 있고 개인생활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와인 제조실도 있다.

 

3층과 4층에는 수많은 창고와 우물까지 이어지는 터널이 있으며 사람들이 거주하던 방, 그리고 창고들도 있다. 특이한 것은 멧돌 모양의 돌이 있는데 이 둥글게 된 돌은 비상시에 통로를 막아 비상시 위기를 피하도록 만들어졌다.

 

5층에는 환기파이프가 있어 지상으로 연결돼 있고 5층과 6층 사이에는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방과 방어용 맷돌이 이곳에도 있다.

 

7층으로 내려갔다. 이곳은 세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지하도시에서 가장 큰 거주 지역으로 이곳에는 우물과 십자가 형태로 된 교회가 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머리로는 초대 신앙공동체를 생각하고, 가슴으로는 당시 성도들의 아픔을 안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평균 수명 22세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열악하고 척박한 음지에서의 삶을 살면서도 아랍인들의 핍박을 피해 신앙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그들이 치렀던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했던 것 아닌가? 만약 나 자신이라면???? 이 질문은 나 혼자만의 질문이었을까?

 

또한 이 안에서는 모든 기독교의 의식이 다 행해졌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이곳을 단순히 지하도시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게는 신앙공동체가 아닌가? 지하 마지막 목적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길에 지하2층을 보니 구유가 있었다. 양의 구유로 이곳에서 양을 키운 후 양의 젖을 짜서 아이들에게 먹이면서 신앙의 다음세대를 남기기 위해 몸부림쳤던 초대신앙공동체의 아픔과 슬픔을 이곳에서 경험했다. 자신들은 비록 고생을 해도 다음세대를 먼저 생각했던 그들, 비상시에는 아이들을 먼저 탈출시키기 위해 아이들의 공간을 먼저 배려했던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오늘의 지혜를 배웠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예배드리는 날이 되어야 예배당에서 비로소 부모들과 상봉할 수 있었고 지하1층에는 다음세대를 말씀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주변벽면에는 아이들이 잘 수 있는 숙소도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너져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위해 합심기도를 드렸다.

 

데린구유를 거쳐 이스탄불로 향했다. 이스탄불에서는 타이타닉호텔에서 머물 예정이다. 이스탄불을 향하며 우리 일행은 우라노스라는 동굴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네브쉐히르공항으로 이동해 이스탄불에 도착한 후 체크인을 하고 저녁식사 후 잠을 청했다.

 

▲ 코라교회 천정중앙부의 모습     © 오종영

 

제6일차(이스탄불) 

코라교회(9:30분) 

이스탄불은 동로마제국의 수도요. 보스포러해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도시이다.

 

우리 일행은 이스탄불 타이타닉호텔에서의 밤을 보내고 오전 9시 숙소인 타이타닉호텔을 나왔다. 이제 우리 일행이 오늘 방문할 첫 번째 장소는 코라교회이다.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지만 이스탄불의 교통체증은 가히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교통체증이 심했다. 드디어 코라교회 지근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시간으로 3월 7일(수) 아침 9시 30분이다.

 

‘코라’는 ‘도시밖에 있다’는 뜻으로 비잔틴예배당의 특징을 잘 살려주고 있는 교회이다. 밤부터 내린 비로 인해 도보하는 일이 다소 불편했지만 이스탄불의 유적을 둘러보는 일정도 빠듯하게 진행될 것 같다.

 

오늘은 코라교회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보스포러 해협에서의 유람선, 로마시대 전차경주의 무대였던 히포드럼과 푸른 타일의 대리석조각들이 아름다운 블루모스크를 둘러본 후 그랜드 바자르를 둘러본 후 톱카프궁전을 둘러봄으로써 터키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이스탄불 공항을 거쳐 귀국하게 된다.

 

특히 오늘 낮에는 교단에서 파송된 터키의 선교사님들을 초청해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격려금을 전달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코라교회는 십자군 이전부터 지어지고 보존이 잘 된 교회이다. 그러나 15세기 무슬림이 들어온 후 학교로 사용했으며 석회를 발랐는데 제거하니 멋있는 그림이 등장했다.

 

원래 이곳에는 5세기에 건립된 코라 성당이 있었는데, 대지진과 이슬람 세력의 성당 파괴 운동의 영향으로 많이 망가지고 다시 재건된 것이다. 현재는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 중 아야소피아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되는 곳인데, 건물 자체는 평범하지만 교회 안은 정교하고 뛰어난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城(성)은 3중으로 된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으로 이 성밖에 코라 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본당은 수리 중으로 볼 수 없었다. 코라교회의 모자이크는 너무 아름다워 모슬렘의 슐탄왕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했으며 금으로 된 벽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긁어가지 못하고 그 위에 석회석으로 덮어버렸는데 오히려 이것이 벽화를 보호해준 셈이 되었고 오늘날 그 석회석을 긁어내 발굴한 후 대중에게 공개한 셈이 되었다. 지금도 회칠한 부분을 제거하면 금을 벗겨간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15세기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됐는데 이때 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이 회칠로 가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다가 1947년부터 미국의 비잔틴 연구소에 의해 그 모습이 세상에 드러하게 됐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의 일생을 담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는데, 신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공생애의 기적과 예수님의 12제자가, 또 구약성경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도 정교하게 묘사돼 있다.

  

갈라타 타워 

코라교회를 나와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유람선을 타기 위해 자동차에 올랐다. 운행 중 바다 건너편에는 갈라타 타워가 보인다. 갈라타 타워는 528년 비잔틴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된 후 1348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1960년대 내부를 수리하면서 현재까지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약 67m로 비교적 높은 편은 아니지만, 신시가지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갈라타 탑에 오르면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바다를 중심으로 한 전망을 한 눈에 할 수 있다. 지금도 갈라타 타워는 이스탄불의 상징적 타워로 자리하고 있다.

  

히포드림

코라교회를 방문한 후 토카프 성에 도착했다. 아침 10시 45분이다. 이동거리가 길지는 않으나 비가 오는 날씨인지라 보행하는데 불편한 점들이 많았다. 토카프성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히포드림을 만났다. 여기서 히프드림을 관람했다. 이곳은 로마시대의 고대경기장 터이다. 바닥은 돌로 되어 있다.

 

블루 모스크 앞의 길쭉한 터인 히포드롬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졌고, 콘스탄티누스 시절에는 검투 경기 대신에 마차 경기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경기장은 10만 명 정도 수용할 수 있으며, 중앙에는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기둥이나 조각상 등이 있고, 밖으로는 트랙이 있는 구조이다. 그러나 13세기 십자군의 침입으로 유적 대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이집시안 오벨리스크만 남아 있다.

 

가운데에 있는 뱀 머리의 기둥은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인데, 479년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을 무찌른 기념으로 세운 것인데 뱀 세 마리가 서로 뒤엉켜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뱀의 머리 부분과 상단 부분이 파손되어 현재는 뱀의 몸통 부분만 남아 있다

  

▲ 아야 소피아성당 상부에서 내려다본 1층의 모습(오른쪽은 리모델링 공사하는 모습)     © 오종영

 

아야 소피아성당(박물관) 

아야 소피아성당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당을 단 5년만에 건축했다니 놀라운 일이다.(432-537년)

 

특히 내부의 24m가 넘는 대리석기둥은 에베소에서 뽑아온 것이며, 나머지 기둥들은 터키 지역에서 아름다운 모든 건축물들을 가져다 맞추고 균형을 맞춰서 지었는데 단 5년 만에 지은 이 성 소피아성은 진도8이상의 지진이 10번 이상 있었음에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성에 들어가기 위해 비를 맞으며 줄을 섰으나 수많은 방문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뤄 입장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그리고 우리 일행 중 한 목사님이 이곳에서 이탈돼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아야 소피아성당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아누스1세(527-565)황제 때인 532-537년 사이 약 5년에 걸쳐 건립되었다. 아야 소피아 성당은 트랄레스(아이든) 출신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스(발라트-쇼케)출신의 이시도루스가 건축하였다.

 

▲ 금으로 된 벽면의 모자이크 작품들 아랫 부분에 금을 긁어간 흔적이 남아 있다.     © 오종영

 

▲ 벽체에 모자이크로 처리된 그림은 금으로 되어 있다. 이 성전에는 모두 600톤을 금을 발랐다고 하니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모자이크를 시멘트로     ©오종영

 

내부의 삼면은 갤러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당내부 면적은 100mX70m이고 돔의 지름은 31.5m, 높이는 55m이고, 돔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다. 내부로 들어가니 그 규모가 상당하다. 성의 한쪽은 수리 중이어서 그 웅장함이 반감되었으나 바닥면이 아찔할 정도로 보인다. 리모델링 시기와 방문 일정이 겹쳐 반쪽만 구경할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2층으로 올라가서 내려다 본 성당 내부는 화려하고 그 크기가 놀라움을 자아내게 했다. 수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내부의 대리석 건물, 그러나 왼쪽부분은 수리중이라 화려함이 가려진 느낌이다.

 

실내를 돌아보니 벽체와 천정에 수많은 모자이크 그림들이 즐비하다. 특히 금가루를 사용해 완성한 그림의 일부는 시멘트로 덧씌워져 있었다. 아랍인들이 금을 긁어가다 후에 시멘트로 발라 놓은 것이다.

 

건물 내부 벽의 상층부와 돔, 둥근 아치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는데 일부 모자이크들은 떨어져 나갔으며 모자이크들은 모두 9세기 이후의 것들로 건물 남쪽 문의 모자이크에는 마리아, 아기예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와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가 묘사되어 있고, 본당 중앙으로 열리는 ‘황제의 문’인 중앙 문 위에는 레옹6세 황제,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횡자표에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자이크가, 오른쪽 아치에는 천사 가브리엘, 남쪽 갤러리 벽에는 마리아, 예수, 세례요한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다.

  

▲ 톱카프궁전의 정원 모습 뒷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 오종영

 

톱카프 궁전

아야 소피아성당을 관람한 뒤 토카프 궁전을 돌아봤다. 이곳은 거대한 대포가 있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안쪽에는 에이레네 성전이 있고 콘스탄티노플 모임이 여기서 있었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을 둘러본 후 뒤쪽으로 향하니 술탄왕이 살던 왕궁이 있다. 술탄은 ‘존귀한’, ‘영광스러운’이란 의미이다.

 

톱카프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 혼, 마르마라 해가 만나는 곳에 있는 궁전으로, 1467년 메흐메트 2세 때 완공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톱카프’라는 말은 터키어로 ‘대포의 문’이라는 뜻으로 보스포루스 해협 쪽에 대포가 놓여져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특히 톱카프 궁전에는 여러 궁정이 있는데, 고고학 박물관이 있는 제1정원은 귈하네 정원 안에 있고, 제2정원은 톱카프 궁전 입장료 내는 곳을 지나면 바로 위치해 있으며, 침엽수와 플라타너스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제3정원에는 시청각관과 도서관 등 각종 전시관이 있다. 이 정원 뒤로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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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02 [15:33]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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