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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터키로 - 초대 신앙공동체의 숨결을 느끼다. ⑤
오종영 목사/영성교회, 본지 발행인,대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오종영   기사입력  2019/01/04 [11:50]

 

▲ 아스펜도스 극장 전경     ©오종영

 

아스펜도스 극장

페니게의 주요 유적지들을 돌아본 후 오전 11시 30분 아스펜도스에 도착했다.

 

이 거대한 극장은 2천 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적이 있고, 1900년 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아스펜도스의 대극장을 바라보면서 문득 사도바울이 생각났다. 바울도 우리를 훨씬 앞서 이곳을 지나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곳을 거쳐 타울로스 산맥을 넘어갔으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는 사도바울의 흔적이 남아있는 땅을 밟고 있는 셈이다.

 

터키에는 동로마문화와 함께 수많은 신전들이 있고 그에 따르는 신화들이 회자되고 있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점은 이곳이 동로마 문화의 숨결이 남아있다 보니 어느 곳에나 신전이 있고 그에 따르는 신화들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일 뿐이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신화를 신앙처럼 떠받드는 이들도 있으나 역시 신화는 신화에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신화 속에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그러나 신화는 우리에게 결코 인생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줄 수 없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해답 역시 들을 수 없다. 오직 성경 안에만 우리의 질문에 대한 모든 해답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와 삶의 목적, 삶의 결국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해답도 준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신화에 열광하고 집착했으며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아프펜도스는 안탈리야 시내의 동쪽 방향에 있는 고대도시로 고대의 기록에 모프소스의 인솔 하에 이곳에 온 아르고스인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B.C 5세기에는 도시명으로 은화를 주조하기도 했고, 아테네 해상 연맹의 회원이기도 했던 아스펜도스는 B.C 334년 베르가마 아탈로스 3세의 유언에 따라 로마에 편입하여 부유한 도시의 삶을 영위했다.

 

이 도시의 유적들은 전부 로마와 그 이후의 것들로 극장 건물은 2세기 로마 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161-180년)에 반원형으로 지은 것으로 건축가 제논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극장은 약 1만 5000석 규모의 극장 맨 뒤쪽 회랑의 갤러리는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보이며 여러 층의 무대 건물은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고 양 옆의 출입(파라도스)문 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크리피누스와 아우스피카투스라는 두 형제의 이름, 즉 국가신의 영광과 황제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 아스펜도스 극장 상단에 서 있는 필자로 아득하게 멀리 보인다. 이 극장의 크기롤 시각적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종영

 

극장은 대규모 보수공사를 거쳐 세계 각지의 방문객들을 맞고 있으며 때때로 각종 사회, 문화, 예술 공연들과 오페라와 발레 페스티벌이 열리기도 한다. 극장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출입구에서 티켓을 끊은 뒤 극장 안으로 진입했다.

 

극장의 규모와 건축물의 위용은 우리를 압도했다. 쌓아놓은 돌 하나하나의 크기가 그 어느 건축물에 비해도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일행은 사전에 가이드로부터 이 극장의 과학적인 건축의 혜택(?)으로 인해 마이크가 없이도 공연자의 육성이 극장 안 모든 곳에 울려 퍼진다는 얘기를 들었고, 이에 우리 일행 중 한 명인 오정호 목사가 특별 공연자로 나서 무대중앙에 서서 찬양을 불렀다. 오 목사로서는 15,000석의 무대에서 공연을 했으니 평생 기억에 남을 듯하다.

 

오 목사는 중후한 저음을 가지고 있어 우리 일행 중 공연자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돌로 된 공연무대에 오른 오 목사가 부르는 찬양소리가 이 극장 안을 울린다. 나는 공연장의 무대 맞은편 가장 높은 곳에까지 올라가 봤다. 무대의 오 목사가 작게 보인다. 그러나 이곳까지도 오 목사의 찬양이 울려 퍼진다. 우리 일행은 ‘앵콜’을 외치며 오 목사의 찬양에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공연장에서는 국제구호단체인 유니세프의 공연이 열리기도 했으며 이 극장은 마이크가 없이도 모든 객석에 공연자의 음성이 전달될 정도로 과학적인 설계가 돼 있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이 공연장 말고도 인근에는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이 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는 버가와 에스펜도스가 하나의 도시였다고 한다.

 

이 극장 왼쪽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만든 다리가 있다.

   

콘야 

이제 콘야로 향한다. 콘야로 향하는 길에는 해발 4000M에 달하는 타울르스 산맥 중 3000M지역을 지나니 흰 눈이 녹지 않은 채로 쌓여 있다. 어느 덧 하루의 해가 아쉬운 작별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라고 사인을 보낸다. 콘야에 이르렀다.

 

‘콘야’라는 지명은 그리스도의 ‘이코니온’으로 ‘이콘의 도시’라는 뜻이다.

 

앙카라에서 240여km 남쪽에 위치한 콘야는 아나톨리아 지역을 대표하는 고도로서 기암괴석의 카파도키아에서 천연온천인 파묵칼레나 지중해로 향하는 길에 잠시 들리는 경유지이기도 하다. 콘야는 이슬람의 한 종파인 메비레비교단의 발상지요 11세기 이후에는 셀주크 왕조 시기에 수도로 번성해 예술과 학문이 꽃을 피웠던 지역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수많은 공연이 무대 위에 올려진다고 한다.

 

또한 콘야에는 거대한 모스크가 언덕 곳곳에 웅크리고 있거나 드높은 첨탑들이 솟아있고 이스탄불의 건축물들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명이 융합된 면이 있다면 콘야의 것들은 이슬람색채가 눈에 띈다.

 

이동 중 휴식을 겸해 카라반들이 휴식을 취했던 가든에 들렀다. 이 가든은 거대한 가든이다. 수많은 대상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심 외곽에서 만나는 낙타대상들의 숙소인 카리반 사라이 '술탄한'은 그 규모에서 콘야가 실크로드가 관통하는 주요 루트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옛 사람들은 이 오랜 길을 오가며 지친 몸을 쉬게 하고, 머리 조아려 기도를 올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곳 시간으로 오후 5시를 앞두고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입구에 소재한 기념품점에 들러 대리체험을 하기 위해 기념품을 구입했다. 필자도 이곳에 들러 7달러를 주고 양가죽 모자를 하나 구매했다.

 

이제 안탈리아에서 갑바도기아로 넘어왔다. 우리가 탄 버스는 오늘 머물 갑바도기아 힐튼 스파 호텔에 도착했다. 참고로 우리 일행은 이번 성지탐방을 하면서 최대한 여행에 집중하기 위해 숙소와 식사에 신경을 많이 썼다. 피곤하면 여행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가장 많이 신경을 쓴 부분이다. 아침과 저녁 대부분은 호텔에서 해결했고 호텔은 5성급이나 특급호텔을 주로 이용했다. 비용지출은 조금 부담이 됐으나 작정하고 떠난 여행인지라 그 효과는 매우 좋았다는 생각이다.

 

힐튼호텔은 실내와 실외에 수영장이 딸려 있고 수영장 물은 온천수로 돼 있다. 뿐만 아니라 내부에는 다양한 스파가 있어 자유롭게 이용할 수가 있어 하루의 일정에 지친 몸을 회복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객실은 126개로 되어 있다. 성지탐방을 원하시는 분들은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이렇게 터키에서의 4일째 일정이 끝났다. 다시 정리해보면 로마시대의 유적지인 페르게를 거쳐 아스펜도스 극장에서 콘야를 경유한 후 갑바도기아에 도착했다.

 

이제 내일부터는 갑바도기아를 거쳐 이스탄불로 이동하게 된다.

 

갑바도기아 

터키에서의 5일차 일정이 시작됐다.

 

갑바도기아는 동부 소아시아에 위치한 신약시대 로마의 식민지 영토였던 곳으로 AD 17년에 티베리우스 황제가 이 지역을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리고 70년에 베스파시아인이 이곳을 소 아르메니아와 합해서 제국의 가장 막강한 보루 중의 하나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로마의 후기 황제들 중 트라야누스(트라얀)의 통치 때에는 더욱 중요한 지역이 되었고 이곳에 수많은 양과 말이 사육되었으며 중앙아시아와 흑해 항구 사이의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성경을 보면 갑바도기아는 오순절에 각지에서 참석했던 여러 지방 사람들 중 갑바도기아인들이 있었다(행2:0)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지방에 이주해 살던 유대인들 중에 이미 신자가 있었고 교회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아침이 밝았다. 호텔에서 조식을 한 후 괴레메교회를 향해 출발했다. 필자는 여행하면서 여행의 내용과 감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여유 있게 종이를 준비했는데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수첩이 더 이상 필기할 공간이 없어 호텔데스크에 부탁해 필기구를 준비한 후 버스에 올랐다.

 

처음 밟는 터기는 나에게 신세계와 같은 곳이었다. 기대와 설렘이 하루하루 나의 마음에 생기를 불러 넣었다.

 

첫 방문지에 도착했다. 바로 ‘괴레메’라는 곳이다.

  

▲ 괴레메 지역 전경     ©오종영

괴레메 

괴레메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수도사들이 이곳에 숨어 살았는데 이곳은 엄청 덥고 겨울에는 추워 4천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다고 한다.

 

‘괴레메’는 갑바도기아 지방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그 뜻은 ‘보이지 않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동굴교회가 많은데 그 이름도 지하 동굴에 알맞은 이름을 갖고 있는 셈이다. 특히 괴레메 지역에는 기괴한 돌들이 흔하게 널려 있는데 위구릅과 젤베지역은 500M 높이의 산악과 절벽이 지진에 의해 무너지면서 원추형 모양을 이루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암석을 파서 수도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괴레메 지역에는 많은 동굴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동굴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당시 어용으로 전락한 교회에 대한 반발로 인해 성 바실리우스가 이곳 괴레메로 왔다. 이곳에는 성배실이 은거했던 성 바실예배당이 있고 밑에는 무덤들도 있다.

 

이곳에는 약 365개의 예배당이 있으며 동로마가 점령한 적이 있다.

 

▲ 동굴교회 내부 전경으로 벽에 성화가 그려져 있다.     ©오종영

동굴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벽과 천장에는 성화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원색이 보존돼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랍계 핍박자들에 의해 성화들이 많이 훼손되었고 우리가 방문했을 때 성화를 보존하기 위해 내부에서는 카메라 촬영이 금지돼 있었다.

 

젤베 계곡에는 포고교회와 사슴교회가 그 중에서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며 낙타계곡에 있는 바위에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일부 동굴집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우리 일행은 그 중 한 집을 방문해 차를 마시며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특히 엘리에스산은 화산이 있는 곳으로 500M가 터져서 사라졌고 그 검은 재가 덮여 있는 곳이 갑바도기야로 이집트의 16왕조 익투스 왕조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 돌에는 수많은 동굴이 형성돼 있어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교회와 수도원으로 사용된 공간도 수없이 많다.     ©오종영
▲ 버섯 형태의 돌들로 이 안에는 사람이 거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종영

또한 헷족속이 140년 이후 이집트에서 점점 후퇴해 거주했던 곳으로 종마(경주마)로 유명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모든 종마의 주산지이이기도 한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지역의 모든 밀을 로마로 이송했던 고스로 그리스도인들이(초대교회)많이 숨어 지낸 곳으로 많이 알려졌다.

 

사실 ‘훌륭한 말의 나라’라는 뜻의 갑바도기아는 역사적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기독교가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발생되었으나 3세기부터 갑바도기아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교회와 성직자의 지역이 되었다. 갑바도기아에서는 수 많은 성직자들을 배출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 계곡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11세기 중반의 2층으로 된 어둠의 교회는 4개의 기둥과 그리스 십자가 구조로 중앙 돔과 3개의 횡좌표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예수의 탄생과 부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고 승천장면이 프레스코화로 묘사되어 있다.

 

버섯 모양의 수많은 돌기둥 속의 교회와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을 나와 기념품 샵이 있는 곳으로 가면 정면에 괴레메 계곡의 진수를 관찰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계곡의 백미가 이곳인 듯하다. 우리 일행은 이곳을 거쳐 게린구요로 가는 길에 계곡 위에서 관찰했던 마을길을 관통해 나왔다.

 

이곳 기념품 샵에서 동으로 된 저울을 하나 샀다. 이곳 샵에는 수많은 기념품들이 있는데 특히 동으로 된 기념품들이 즐비했다. 오정호 목사가 샵 주인과 흥정을 잘 했고 함께 사면 할인을 해줘 25불을 지불하고 구매했고 지금도 내 책상위에서 공평과 중심 잡힌 삶에 대한 생각을 되뇌이게 해주고 있다.

 

▲ 괴레메 지역에 있는 한 동굴집을 방문해 따뜻한 차를 한잔 하면서 쉬어가는 여유를 가졌다.(필자가 속한 노회의 성지탐방대원들)     ©오종영

 

▲ 이 돌집에서 우리 일행은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누며 여로에 지친 몸을 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도 이 건물에는 사람이 거주하며 차도 팔고 있다.     ©오종영

 

 

데린쿠요 

이제 데라귀를 거쳐 데린쿠요로 간다.

 

데라귀에서는 지하 15M의 지하도시가 발견됐는데 이곳은 평균 수명이 21세일 정도로 이곳에서 나고 죽었던 아주 열악한 환경인데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 이곳은 계속 발굴이 되고 있다. 이 굴 속에서 지내면서 아이들 신앙교육을 비롯한 모든 삶이 이뤄졌던 곳으로 초대 신앙공동체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해야만 했던 아픔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데린쿠요는 지하 11층이나 내려가야 한다. 안에는 수도사들과 박해 뒤 이주해 온 그리스도인들의 유골도 있다. 그리고 대형식탁은 수십명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석조시설로 돼 있고 큰 주방이 옆 공간에 마련돼 있다.

 

데린쿠요에 도착했다. 어느덧 시계는 현지시간으로 오후 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은 발굴된 지 오래되지 않았고 지금도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다. 데린쿠요는 유네스코 문화유적지로 지정돼 있는 곳으로 약 2만 여명이 이곳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초대 공동체 시절 기독교가 핍박을 받던 시절에 로마를 피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20대 초반으로 여기서 나고 죽기까지 했는데 평생을 태양 한 번 못보고 살면서도 성도의 신앙을 지켰던 그들을 향한 경외감이 든다. 아니, 나태한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입구로 들어갔다. 1층에 해당하는 곳에 도착했다. 이 자리는 당시 학교였다. 그리고 바로 밑층인 지하 1층에서는 양떼를 키웠고 여기서 나는 우유를 먹고 살았다고 한다. 동굴은 우물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대 공동체가 있던 이곳에는 세례 터도 있고 중간 중간에는 파수꾼이 배치돼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고 한다.

 

더 내려가니 예배드렸던 장소가 나온다.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자명했다.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요, 또한 빵을 얻고 물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헤어져있던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지하 8층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국의 무너져가는 다음세대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초대 공동체를 통해 믿음과 삶의 지혜가 드러나는 현장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사명을 재검점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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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04 [11:50]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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