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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터키로 - 동로마 문화와 사도들의 흔적을 경험하다. ③
오종영 목사/영성교회, 본지 발행인,대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오종영   기사입력  2018/11/23 [16:28]

▲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사데의 유적지(왼쪽에 지붕이 없는 모습으로 돼 있는 붉은 건물이 사데교회 건물 터이다).     ©오종영

사데교회(사르디스)
두아디라를 거쳐 도착한 곳은 사르디스(사데)로 우리에게는 ‘사데교회’라는 명칭이 익숙한 이름이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아시아 7교회의 지명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1.에페소스(에베소) 2.스미르나(서머나) 3.페르가몬(버가모) 4.티아티라(두아디라) 5.사르디스(사데) 6.필라델피아(빌라델비아) 7.라오디케이아(라오디게아)이다.

그러고 보니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벌써 다섯 번째 지역에 도달한 셈이다. 이제 이곳을 거쳐 빌라델비아를 방문하면 오늘 일정이 마치게 된다.

자동차를 타고 사데로 이동하는 구간 오른쪽으로 사데체육관이 보인다. 대리석으로 건축된 체육관은 ‘김나지움’이라고도 한다. 이 체육관은 17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로마 시대에 건축된 거대한 체육관을 높은 지대에 인위적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이 체육관은 동편에는 씨름장이, 서편에는 목욕탕이 있었는데 당시 이곳에서는 단순히 육체만을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교육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체육관 씨름장 남쪽에는 회당이 있는데 100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지금까지 알려진 유대인 회당으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200년~616년까지 교회로 사용됐다고 한다.

사데는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페르시아 제국의 중요한 도시로 로마 제국의 총독이 다스리던 곳이었다. 그리고 로마 후기와 비잔티움 제국내의 리디아 속주의 수도였다. 성경에서는 소아시아의 7 교회중의 하나로 주민들은 나약하기로 유명하였고 부정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트몰루스 산기슭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맥에 자리 잡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 헤르무스 강 유역의 중앙평원이 내려다보이는 페르시아 왕도의 서쪽 종점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BC 7세기 당시에는 번성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금·은 화폐를 주조한 최초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BC 546년경 페르시아에 정복당했으며 아테네, 셀레우코스 왕조, 이탈리아에 차례로 지배를 받다가 BC 133년 로마로 넘어갔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대도시권의 중심지이자 로마령 리디아 지방의 사법권 집행 중심지였다. AD 1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나톨리아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사데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는데 그 신전 옆에는 가장 오래된 교회 터가 있으니 바로 사데교회이다. 지금은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교회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5개의 둥근 지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지역의 특색을 하나 들자면 무엇보다도 1000여개가 넘는 리디아인의 무덤유적과 리디아의 성체를 들 수 있다. 사르디스를 발굴한 결과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술했던 리디아 시대의 도시 유적 사데가 이렇게 된 것은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부족함이 없다보니 방심하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데를 둘러보니 경제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부요하고 강한 곳이었다. 바로 이런 부함이 가난함으로 그들을 끌어내린 것이다. 방종의 대가로 인해 고레스에게 먹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곳 사데교회가 고레스에게 함락된 이유는 ‘금’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부로 상징되는 금은 그들을 방심하게 만들었고 그 방심으로 인해 고레스에게 먹히고 만 것이다. 한마디로 삽시간에 먹히고 말았다고 하니 우리의 부함도 결코 자랑거리만은 될 수 없고, 의지하고 지탱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데에 대한 유적 발굴 작업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팀에 의해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돼 1950년 이후 지금까지 하버드 대학팀과 코넬 대학팀에 의해 발굴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가 무려 300개 이상이나 발굴되었고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 있어 크로이소스왕의 전설적인 부가 역사적인 사실로 밝혀졌다. 바로 이런 부함이 사데 사람들을 방심하게 했고, 교만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성경말씀대로 너무 부하게도 하지 말고 가난하게도 하지 말고 적당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생각했다.

사데교회가 겪었던 똑같은 위기가 우리에게도 어느 때 닥쳐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늘 경성하고 깨어있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우리 믿음의 부요한 생명력을 위해 기도했다. 그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사역하고 생명력 있는 믿음이 목회의 생명력으로 승화하여 믿음의 부요를 누리게 해 달라고 간절한 두 손을 모았다.
 
▲ 파묵칼레에서 빌라델비아로 향하는 길 양편에는 수십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포도농장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차창 밖으로 보이는 포도농장     ©오종영

빌라델비아교회
다음 목적지는 빌라델비아교회이다.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은 필리아(사랑)와 델피아(형제)가 합쳐진 복합명사라고 한다. 그래서 빌라델비아는 ‘형제사랑’이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이다.

사데에서 빌라델비아까지는 약 32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리고 빌라델비아로 향하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농장이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동거리가 약 40분 정도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포도농장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산지를 이루고 있었다.

터키는 포도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확하는 모든 포도는 바로 건조해서 건포도를 생산해 낸다고 한다. 그러나 판로가 만만치는 않다고 하니 농민들의 마음고생이 많을 것 같다. 다소 무료한 구간을 지났으나 명품 가이드 박정식 목사의 해박한 신화와 신학, 지리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니 드디어 빌라델비아에 도착했다.

빌라델비아는 그다지 큰 지역이 아니다. 그러나 유독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성경에서 칭찬만 했던 교회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닮고 싶었던 교회’,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는 교회’로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던 교회였다.

빌라델비아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차에서 내려 빌라델비아교회 유적지로 이동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도심 한가운데 자리를 한 채 보존돼 있었다. 교회 유적지로 가는 길에는 많은 상점들이 있었고 특히 고소한 빵 냄새가 여로에 지친 마음을 훔치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은 빵과 밀이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특히 터키지역의 빵맛은 유럽의 어느 나라 못지않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빌라델비아는 진도8이상 지진이 10번 이상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유적들이 무너졌고 현재 교회건축 돼 있는 빌라델비아교회는 신전에서 뜯어 온 건축물을 가져다가 활용했다고 한다.

교회의 큰 기둥이 원래 6개가 있었으나 지진으로 무너져 내려 두 개만 황량하게 남아 있었고 유적지는 펜스로 둘러쳐 있어 외부만 돌아가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는 빌라델비아교회에게도 큰 아픔과 상처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몸부림과 지혜의 산물로 만들어진 도시도, 유적지도 자연 앞에서는 한낱 물거품과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에게는 내일보다는 오늘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말론적 신앙’을 늘 강조하면서도 오늘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내일의 행운에 기대고자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책망해 본다.

▲ 둘째날 마지막에 들렀던 빌라델비아교회의 유적지 모습. 이곳에는 벽에 이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아 후대들에게 기억하도     ©오종영

빌라델비아교회는 방문하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빌라델비아교회 유적을 살펴보니 벽에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고 동역자를 기억했다는 점이다. 마치 어린양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놓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목회자로써 과연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성도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성도로써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은 그들을 더 소중한 헌신자로 세워주는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빌라델비아교회 후대의 사람들은 여기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면서 그들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가장 불편했던 점은 많은 사람들이 갈탄을 난방용으로 사용하다보니 공기가 매우 탁했다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갈탄연기로 인해 호흡하기가 불편했던 점이다. 갈탄연기는 숙소인 호텔 주변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필자는 기관지가 약한 편인지라 여행 중에 기관지에 가래가 심하게 끼는 불편을 겪었는데 귀국 후 6개월 이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빌라델비아 유적지를 관람하고 있으니 박정식 목사가 빵을 사들고 나누어 줬다. 어찌나 맛이 있던지 남아있는 빵을 가지고 숙소에 가서 먹어보았더니 이내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어느덧 하루의 해가 지려고 한다. 희미하나 땅거미가 도시의 하늘을 스멀스멀 덮어오고 있다. 이스라엘에 비해 이동거리가 멀다보니 시간을 재촉해 일정을 진행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이제 다시 차량에 탑승하고 숙소인 파묵칼레에 있는 DOGA THERMAL HOTEL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120실에 불과하지만 중앙공간을 지하부터 상층부까지 개방시켜 쾌적한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는 특급호텔로 식당과 스파를 겸한 수영장 시설까지 딸려 있어 여행객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는 그만이었다. 짐을 정리한 후 식당에 마련된 음식을 먹고 일행들과 스파와 수영을 즐기며 하루에 대한 감사를 드렸다.
 
▲ 우리 일행은 히에라폴리스에 도착해 후문을 통해 거대하게 널부러저 있는 무덤군을 따라 순교자 빌립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 올랐다(후문 입구 모     ©오종영

파묵칼레(히에라폴리스, 파묵칼레의 석회봉, 온천욕장, 원형극장)
제3일차 일정이 시작됐다.

오늘 일정은 파묵칼레의 히에라폴리스에서부터 시작된다. 비교적 이동거리가 짧은 곳이라 아침에 다소의 여유시간을 가지고 일행은 출발했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이다. 이유는 경사면을 따라 흐르는 온천수가 빛어 낸 장관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석회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는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 위를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어 마치 하얀 목화로 만든 성을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온천수의 온도가 섭씨 35도인데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져 치료와 휴식을 목적으로 그리스와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의 언덕위에 세워진 고대도시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페르가몬 왕국에 의해 세워진 후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번성기를 구가했으며‘히에라폴리스’라는 이름은 페르가몬이 왕비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는데 그리스어로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하고 있다.

▲ 파묵칼레의 노천탕에서 관광객들이 온천을 즐기고 있다.     ©오종영

▲ 이 수로를 따라 온천수는 라오디게아와 골로새까지 공급됐다.     ©오종영

이곳에는 로마시대의 원형극장과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유적이 남았고 원형극장은 최대 1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고 무덤수도 1000여개가 넘으며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들이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있다.

우리 일행은 정문이 아닌 후문 쪽에서 탐방을 시작했다. 후문 입구에는 평민은 없고 장군들과 영웅들의 무덤들이 즐비하게 길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실로 거대한 무덤군이다. 크기의 차이는 약간 있었으나 자신들의 무용담과 이름을 후대에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 군상들의 욕망들이 담겨 있는 무덤들이다. 마음이 숙연해 진다.

묘지 앞에는 그들의 업적이 즐비하게 기록돼 있다. 그러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도, 무덤도, 모두 무너지고 마는 것을..... “오직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하다”는 고백이 이곳에서 나도 모르게 나왔다.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듯이 비석에 새겨진 이름도 세월의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판독할 수 없는 무용담으로 남고 말 것을........

하루살이 인생, 아침안개 같은 인생에게 남길 자랑거리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나 당대의 영웅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영웅도, 호걸도 결국은 죽음 앞에 거역할 수 없고, 모두가 땅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었던 것일까? 만감이 교차한다.

▲ 히에라폴리스에도착해 후문으로 진입하면 길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페르몬왕조 시대의 무덤군들이 우리의 시야를 빼앗는다.     ©오종영

입구에 들어서니 거대한 관이 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2천 년 전에 닦여진 그 길을 걸었다. 박석으로 된 돌길을 따라 약간의 경사진 길을 오르면서 돌로 된 무덤들을 바라보며 무덤 안을 들여다봤다. 무덤의 규모만이 당대 그들의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을 뿐 이름 없는 영웅들의 무덤으로 변해 있었다.

아쉽게도 이 길을 아내와 함께 걷지 못했다. 체력이 고갈된 아내는 몇 몇 사모들과 함께 별도의 가이드와 함께 파묵칼레 석회봉과 온천 지구에서 오후의 일정을 위해 숨고르기를 하면서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둘이 걷는 것이 혼자 걷는 것보다는 좋았던 것 같다.

조금 오르다보니 페르가몬과 그리스 시대의 도시가 보인다. 페르가몬과 같은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는 유적은 거대한 도시다. 무엇을 바랐기에 이렇게 했을까?

조금 더 언덕으로 올라가니 백향목이 가득한 전차경기장도 있다. 이곳의 백향목은 레바논의 백향목에 비견할 수는 없으나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으며 이 백향목은 깎을수록 향기가 짙어 성전의 식양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드디어 페르가몬 시대의 성문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온천수가 있어 골로새, 라오디게아까지 온천수를 공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1500년 전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도 있었다. 비록 파괴되기는 했으나 큰 예배당이며 당시의 하수구도 남아 있었다. 오르막길을 계속 걷다보니 언덕 위로 빌립의 순교교회가 보인다. 무겁지만 발걸음이 빨라졌다. 오르다보니 사형장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영문 밖으로 가는 길이다. 후에 이곳이 신성한 장소로 바뀌었다고 한다.

▲ 사도 빌립이 순교한 무덤     ©오종영

사도빌립이 순교당한 장소에 도착했다. 교회가 무덤이 된 것이다. 기둥은 모두가 비잔틴의 기둥들이다. 1500년 전의 교회건축물인 것이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최근 방황의 늪을 걷고 있는 총회와 총신을 위해, 그리고 노회와 섬기는 교회, 민족과 열방의 복음화를 위해 순교자의 영성을 달라고 기도했다.

순교자 빌립의 순교의 음성과 아픔이 아련히 전해 온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일까를 되새겨 본다. 일행은 빌립의 순교당한 무덤을 배경으로 다녀온 흔적들을 남기고 있었다. 이렇게 사도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복음의 영성을 가다듬는 유익한 시간을 이어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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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23 [16:28]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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