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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터키로 - 동로마 문화와 사도들의 흔적을 경험하다. ①
오종영 목사/영성교회, 본지 발행인,대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오종영 기사입력  2018/09/10 [13:25]

▲ 이스라엘에서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아침의 여명이 떠오르기 직전이었으나 구름위에는 태양이 기세등등하게 떠오르고  있다.  ©오종영

대전에서 인천공항을 거쳐 이스라엘에 온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동안의 이스라엘에서의 생활은 이제 시차도,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조금씩 자연스러워져 갔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다. 본래 예정된 일정표대로는 아니었지만 한국을 출발하기 전 정해진 코스는 욥바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둘러본 셈이다.

우리 일행은 이스라엘에서의 마지막 이틀은 라마다호텔에서 묶었다. 베들레헴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보낸 곳은 예수님 탄생교회였다. 헤로디움을 거쳐 목자들의 들판교회를 들른 후 예수님 탄생교회에 들렀으나 수많은 순례객들과 그리스정교회의 미사로 인해 정상적인 탐방이 이뤄지지 않아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예수님탄생교회는 가톨릭과 그리스정교회, 마르메니아정교회가 소유권과 사용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예수님탄생교회 대부분은 그리스정교회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동굴 위의 제대에서 왼쪽부분은 아르메니아정교회가 소유권을, 구유의 동굴 부분인 제단과 구유는 가톨릭이 소유하고 있다.

예수님탄생교회를 둘러본 후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하루의 해가 재색구름에 기운을 잃고 부끄러운 듯 숨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예수님 탄생교회 광장을 빼곡히 차지하고 있는 군중들의 틈을 비집고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한 후 다시 라마다호텔로 향했다.

다른 날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에 탐방이 끝났으나 이후의 일정은 여유가 없었다. 이제 숙소로 이동해 식사를 하고 이른 잠을 청한 후 이스라엘을 떠나 터키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온 일행들은 식사를 하고 짐을 꾸린 후 이른 잠을 청했다. 스마트폰의 알람을 새벽 1시에 맞춰놓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 후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 짐을 챙긴 후 1층에 대기 중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버스는 예루살렘의 라마다호텔을 출발해 텔아비브 공항을 향했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출국수속을 거쳐 오전 5시 40분 텔아비브공항을 출발해 두 시간여의 비행을 한 끝에 터키의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했다. 이스라엘과 터키는 1시간의 시차가 있기에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터키시간으로 오전 8시 45분이었다.
 
터키
신화의 고장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터키의 아시아 대륙영토는 ‘아나톨리아’이고 유럽 대륙에 속한 영토는 ‘트라키아’라 칭한다.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어로 ‘동쪽의 나라’‘태양의 동쪽지역’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고대에는 ‘소아시아’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는 이스탄불 해협과 차낙칼레 해협, 마르마라 해는 터키영토를 둘로 나누었다. 거기다가 영토의 삼면을 흑해, 에게해, 지중해가 에워싸고 있으며 면적은 776,723평방미터로 우리나라의 8배에 달한다.

국민은 터키인, 쿠르드족,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희랍인, 보스니아인, 조지아인, 서어카시아인, 알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체첸인 등 다양한 인족의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수도는 앙카라로 약 38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고 있으며 종교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으나 99%이상이 이슬람교도들이며 1인당 GNP는 약 1만불 정도로 철광석과 석탄, 크롬광이 주요자원으로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과 전자제품 등도 주요 산업자원으로 돼 있다.

터키는 1922년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케말 파샤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1923년 터키공화국을 선포했으며 세속주의에 바탕을 둔 법치국가로 동쪽으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서쪽으로 그리스, 불가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등 터키는 영토를 7개 지역으로 나눈다. 특히 아나톨리아 지역은 12,500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거주지는 구석기 시대인 B.C 10,500년 경 산르우파 지역의 교벡리테베이다. 그리고 콘야, 차탈회육과 부르두르 등지에서는 B.C 8000~5500년 사이의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아나톨리아는 B.C 1660~1190년 사이에 최초의 국가를 건설하고 하튜샤를 수도로 하였다는 비문 기록이 남았고, 아나톨리아 최초의 문자는 앗시리아 상업 식민지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에서 B.C 1600년부터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국가였다.

그리고 B.C 2세기 이후 아나톨리아에 들어오기 시작한 로마는 B.C 30년경부터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은 395년 둘로 분열된 이후 아나톨리아에 동로마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9세기 중반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아나톨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1078년에 이즈닉을 수도로 한 셀주크가, 1299년에 쇼우트를 수도로 한 오스만 베일릭이 성립되었으며 동로마 제국(비잔틴제국)이 1453년에, 셀주크는 1308년에, 오스만 제국은 1922년에 아나톨리아와 트라키아 반도위에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 프리타니이온, 아데미 여신의 숭배 장소로 알려진 곳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세워졌다. 이곳에서 아데미 신상이 발견됐다.     ©오종영

이즈미르에서 에베소로, 그리고 아브라함과 엔데르와의 조우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국내선 항공으로 갈아타기 위해 이동했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깊은 피곤이 몸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억누르고 있었다. 공항 안 분수대 앞에서 잠시 대기한 후 이즈미르행 터키항공에 탑승했다. 드디어 오전 11시 5분 터키 최대의 고대문화유적지가 있는 에페소를 향해 출발했다. 피곤이 몰려온다. 하긴 새벽잠을 설치며 이동에 이동을 거듭한 것이 벌써 12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이즈미르’공항을 향해 굉음을 내며 이륙을 한다. 깜박 잠이 든 후 깨어보니 어느덧 이즈미르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우리가 탄 비행기는 두 시간의 비행 끝에 이즈미르공항에 도착했다.
 
이즈미르는 옛말로 ‘서머나’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터키에서 우리 일행의 발이 되어줄 이브라임 기사(이브라임은 ‘아브라함’의 터키식 이름이다)와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줄 가이드 엔데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버스에 탑승한 후 에베소로 이동했다. 새로운 문화와 사도바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둘러보면서 느끼게 될 감동을 떠올리면서 차창 밖으로 들어오는 낯선 나라의 풍경에 마음을 맡기다보니 어느새 우리가 탄 버스는 에베소의 중심가를 지나가고 있었고 곧이어 버스에서 하차하니 산등성이에 십자군 전쟁 시 조성된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 에베소의 유적지들 멀리 셀수스 도서관이 보인다.     ©오종영

터키에서의 첫 친구 에베소에서의 일정이 시작되다.
에베소는 이즈미르의 남서쪽 약 50km 지점으로 양향을 끼고 상업중심지로 발전한 곳이다. B.C 7세기~B.C 6세기가 최 전성기였으며,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경이롭게 부흥했다. 1세기 바울은 이곳에 기독교를 전했으며, 또한 로마에서 이 지역 신자들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에베소는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동방정복 때 다시 그리스도에 복속됐다.

이곳은 ‘셀축’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2000년 전의 위용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는 원형극장과 셀수스 도서관 등은 지금도 당시의 위용을 느껴볼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AD 135년 셀수스 장군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는 셀수스 도서관은 에베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터키의 버가모 도서관과 더불어 고대의 세계 3대 도서관으로 꼽히고 있다. 지금은 건축물의 대부분이 무너져 입구의 장엄한 문만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예지와 덕성, 사려와 학술을 의미하는 네 여신의 조각상이 있다.

▲ 셀수스도서관 전경, 도서관 앞쪽으로는 지하통로를 통해 갈 수 매음굴이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도 얌천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오종영

▲ 셀수스 도서관 앞에서 우리 일행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종영

셀수스도서관은 12,000여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던 학문의 전당으로 이 도서관의 앞쪽에는 매춘굴이 있고 이곳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지하통로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지식인들도 점잖지 못한 곳엘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셀수스 도서관 건너편에는 25,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극장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시낭송과 음악회도 열렸고, 격마, 격검, 씨름, 죄수 사형, 검투사들의 시합도 열리곤 했다.

그러나 에베소 유적지는 정돈된 유적지라기보다는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 화려하고 찬란하기만 했던 문명의 잔해들만 남아 있었다. 수많은 유적들이 버려지다시피 한 것처럼 널부러져 있는데 사실 에베소의 중요한 유적들은 영국과 비엔나로 반출되었고, 터키정부가 이곳 셀축시에 박물관을 건립하면서 진열을 위해 상당수를 반출했다고 한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수많은 유적들이 흔해빠진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연스런 모습을 통해 역사의 숨결을 원형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유적에 너무 손을 많이 대고 현대화시켜 인위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데 많은 대조가 되고 있었다.
 
▲ 사도요한기념교회내의 사도요한 무덤.     ©오종영

사도요한의 박해의 문(일명 승리의 문 또는 사도요한기념교회)
에베소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린 후 방문한 첫 유적지는 사도요한의 박해의 문(일명 승리의 문 또는 사도요한 기념교회)이었다. 이곳은 약간의 낮은 언덕길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사도요한의 박해의 문을 향하다보면 사실 첫 눈에 들어오는 유적지는 버스에서 관찰했던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성곽이었다. 성곽을 바라보며 잠시 걸어 올라가니 승리의 문이 나왔다.

이곳에는 사도요한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바울은 이곳에서 3년, 그리고 사도요한, 디모데, 오네시모가 헌신하고 섬긴 교회가 바로 에베소교회이다. 그러나 현재 사도요한기념교회는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정면을 응시하면 눈에 들어오는 정상의 성안에 있다. 그곳은 출입을 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둘러볼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십자군 전쟁 시라고 한다.

이곳에 예배당을 건축한 유스트니아누스 황제는 건축의 대가였다. 그가 예배당 건축에 집착한 것은 죄 용서함에 대한 갈망이 컸었기 때문이다. 에베소의 역사는 이렇다. 1962년 사도요한교회의 주차장 공사 중 기원전 1400년 전의 것으로 알려진 미케네시대의 무덤과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에베소역사의 가장 오래된 흔적으로 알려졌다.

▲ 도미티안 황제의 신전으로 81년 로마 황제가 된 도미티안 신적으로 에베소에서 가장 큰 신전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서 동상이 발견됐다.     ©오종영

그리고 1990년 사도요한교회 성곽 주변을 발굴하던 중 에베소 이전의 알려지지 않은 선사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1860년에 발견된 아데미 여신상이나 아데미신전 만큼 중요했다. 그 이유는 여러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아파스와 에베소는 같은 뿌리와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고대도시 아파스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사도요한기념교회를 방문했을 때 관리인의 특별허락으로 이곳에서 찬양을 한 후 기도하는 감동도 경험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이곳에서 마음을 모아 기도한 후 뒤로 돌아가니 세례터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세례터는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계단이 지어진지가 430년이 넘을 정도로 유서 깊은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도요한 기념교회의 모형이 있어 한눈으로 전체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실물을 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건물은 모든 자리를 뜯어 등성이 정상에 있는 성곽 안으로 가져갔는데 출입이 불가능해 아쉬운 마음만 달래면서 고개를 들고 마음의 궁금함을 쏟아내며 내려와야 했다.
 
▲ 원형극장은 25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로 돼 있다.     ©오종영

에베소의 수많은 유물들과 관용아고라 및 신전터
사도요한교회를 내려온 우리 일행은 가이드 박정식 목사의 안내를 받으며 유적지로 들어갔다. 유적지는 서문에서 출발해 마리아교회가 있는 곳을 향해 이동하며 유적지들을 감상했다. 먼저 방문한 곳은 관용아고라와 수많은 기념비들이다.

에베소 입구에 들어서면 위치하고 있는 첫 번째 유적은 바리우스목욕탕이 있는데 이곳은 1926년 처음 발견된 후 지금까지도 발굴 중으로 전형적인 로마식 목욕탕으로서 냉탕과 온탕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목욕탕은 거대한 석회암벽돌을 이용해 벽을 두른 후 둥근 천장모양을 하고 있었다. 또한 남쪽에 위치한 화장실과 체육관은 외부 날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내부를 대리석 모자이크로 마감해 놓았고, 넓은 홀은 당시 황제였던 플라비우스와 그의 부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목욕탕 앞 쪽에는 큰 광장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은 에베소의 관용아고라이다.

아고라는 1000개가 넘는 세계최고의 시장터로 당시 이 도시의 풍요를 증명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그리고 관용 아고라를 중심으로 수많은 신전들이 좌우로 들어선 가운데 돌로 깔아놓은 도로가 개설돼 있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오데온 신전이, 바실리카 남쪽으로는 플리타네이온 신전과 기둥이 늘어선 도로가 위치하고 있고, 아고라의 경사진 서쪽 부분을 이층으로 만들어 위층은 도미티안 광장과 연결되고 아래층 부분은 아고라로 연결된다.

또한 아고라 산 가운데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집트여신인 이시스에게 바치는 작은 신전이 있는데 이집트의 신앙은 사후세계를 약속하기 때문에 소아시아에는 많은 도시에서 이집트 신들의 신전을 만날 수 있었고 에베소의 또 다른 이집트여신의 신전은 상업아고라 근처의 세라피스 신전이 있다. 이시스 여신의 신전은 아우구투스 황제시절에 파괴되었는데 전면의 폴리페모스 조각상들은 도미티안 광장에 있는 폴리오 분수에 장식되어졌으며 그것은 옥타비아누스 황제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에베소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우선 대극장이 있는데 2만 5000명을 수용할 정도이다. 그리고 고대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인 아데미 전각이 있다. 그런데 이 아데미 신전이 한 정신병자에 의해 BC 356년에 불타 버렸다. 그러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방문하여 신전이 불탄 것을 보고 신전복구를 제안했으나 에베소인들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신전을 재건했는데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게 지었다.

또한 에베소에는 수많은 신전 터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고 그리스의 승리를 상징하는 여신인 니케여신상이 보존돼 있다. 니케여신상은 한손에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면류관을 들고 있다. 여기서 종려나무는 번영과 승리를 상징하고 면류관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발행인 오종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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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10 [13:25]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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