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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발행인 오종영 목사 성서의 땅 이스라엘을 가다 ⑧
오종영 목사/영성교회, 본지 발행인,대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오종영   기사입력  2018/07/06 [15:12]

▲ 통곡의 벽에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사연을 담아 하나님 앞에 올린 기도의 글을 적은 쪽지들이 빼곡히 틈새에 채워져 있다.     © 오종영(발행인)



통곡의 벽 앞에 서다.
낮의 해가 기운을 잃기 시작할 무렵 시작됐던 십자가의 길=VIA DOLOROSA는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움이 짙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나와 근거리에 있는 통곡의 벽을 향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이제 예루살렘에서의 일정도 하루 남았다. 내일 저녁까지의 일정 후 짧은 수면을 취한 후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새벽 1시경 다음 여행지인 터키를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 날 일정은 지역적으로는 좁은 지역이랄 수 있으나 방문지가 워낙 많아 매우 분주하게 움직인 하루였다. 이번 성지순례 중 가장 빡빡한 일정이 진행된 하루였다. 예수님을 부인한 후 닭 울음소리를 듣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성 밖으로 뛰어나가 울었다던 그 통곡의 벽, 베드로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이 베드로의 마음으로 감정이입 돼 발걸음을 옮겼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장소 ‘통곡의 벽’
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마음의 안식처요 성지 중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 조상들의 애환이 서린 성벽에 각별한 감동을 가지는 유대인들은 이곳을 7세기경부터 기도의 구심처로 삼았고 해마다 아빕월 9일이 되면 유대인들은 이곳 서쪽 벽에 모여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며 옛날을 회상하며 통곡한다고 한다.

솔로몬 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은 BC 587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BC 515년에 성전을 재건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제2성전이다.

또한 헤롯왕 때(BC 37~AD 4년) 제2성전을 대폭 중축하여 새롭게 단장했기 때문에 헤롯 성전이라고도 한다. 이 성전은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유대인들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대파되었으며 그 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유대 지역의 이름을 팔레스티나로 바꾸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시켰으며,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년 중 하루 성전이 무너진 날인 아브월 9일(양력 7~8월)만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이 때 유대인들은 성전산 서쪽 벽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하여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거룩한 장소로 국가적인 큰 행사들이 이곳에서 많이 열리고 있으며 모든 유대인들의 기도의 장소이며 성년식을 거행하기도 한다고 한다.


▲ 통곡의 벽 앞에 선 필자가 기도를 하고 있다. (모자를 쓰고 기도하는 사람이 필자)    ©오종영(발행인)

이곳을 방문해 보니 예루살렘 외벽에 위치한 통곡의 벽 주변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매입해 소유하고 있는 건물들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여기서 가이드 박정식 목사는 통곡의 벽을 방문 시 유의할 점에 대한 안내와 더불어 통곡의 벽 주변에 있는 일부 유대인들 소유의 건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건물이 수백억 원에 해당하는 건물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유대인들의 측량할 수 없는 여호와 신앙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의미 있는 장소인지라 필자도 이곳에서 통곡의 벽을 배경으로 아내와 기념촬영을 한 후 남, 여가 각 각 다른 출입구를 통해 통곡의 벽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에 일행들과 어울려 통곡의 벽을 향해 출입구를 거쳐 가까이 다가갔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자를 써야 하며 없는 순례객들은 무료로 입구에서 빌려 사용할 수 있었다.

통곡에 벽 가까이 이르자 유대인의 랍비들이 자리를 잡고 오고 가는 순례객들을 친절히 맞이해 주었고, 우리 일행 중 일부는 랍비들에게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여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랍비들이 자신의 어린 아들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랍비를 아버지로 둔 아이들은 그곳에서 랍비 수업을 한다고 한다.

유대인의 랍비들은 특정한 직업 없이 오직 랍비의 직무만 수행하며 군대도 안가고 모든 생활을 정부에서 책임진다고 한다. 오직 종교적인 직무에만 전념하고 있는 셈이다.

통곡의 벽으로 향했다. 벽에는 많은 틈새가 있었고 그 틈새 사이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쪽지들이 꼬깃꼬깃 틈새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그 쪽지들은 순례객들이 자신의 사연을 기도문으로 담아 꽃아 놓은 것들이다.

우리는 쪽지를 꽂지는 않았으나 잠시 동안이지만 베드로의 마음으로 두 손으로 통곡의 벽을 짚고 지난날의 수많은 사연을 함축해서 죄송한 마음을 담아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통곡의 벽을 떠나 숙소로 향하는 시간이다. 예루살렘은 황갈색의 도시 불빛으로 길거리와 건물들을 수놓고 있었다. 이 날은 금요일 저녁이기에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래서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큰 도로에도 자동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면서 보니 수많은 유대인들이 줄을 지어 회당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해가 지기 전 자동차를 타고 왔거나 아니면 걸어서 왔을 것이다. 유대인의 안식일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긴 여로를 뒤로 하고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은 꿀잠을 잘 것만 같다. 숙소에는 스파가 있었으나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 없어 숙소에서 식사 후 간단한 샤워를 한 후 오늘의 일과를 잠시 동안 노트북에 정리한 후 예루살렘에서의 넷째 날 저녁잠을 청했다.
 
5일차 여행이 시작됐다.
우리의 예루살렘에서의 일정은 사실상 오늘까지이다. 내일 새벽에 이곳을 떠나 터기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주한 일정이 빼곡히 기다리고 있다. 어제 못지않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일행은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는 이벤트 행사가 있었다. 결혼 35주년과 25주년을 맞은 오정호 목사와 김병오 목사 부부가 있어 마음을 담은 40인의 축하를 그들에게 전달했다. 예루살렘에서 맞은 결혼기념일, 뜻깊은 마음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 시온산 출입문에는 6일전쟁 시 생겼던 수없이 많은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 오종영(발행인)

시온산에 도착했다.
시온산 출입문에는 수많은 총탄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문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군의 공격에 6일 전쟁에 돌입했고 당시 요르단이 점령하고 있던 이곳을 이스라엘이 접수하여 1967년 동예루살렘을 접수한 것이다.

오늘날 시온산이라 불리는 이 산은 예루살렘 시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765m의 언덕을 가리키는데 이 산의 동쪽은 중앙 골짜기에 의해서 삼면이 경사를 이루고 있다.‘시온’이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서 처음 사용되는 곳은 다윗이 예루살렘의 가나안 원주민이었던 여부스족이 머물던 ‘시온 산성’을 빼앗았을 때이다(삼하 5:7). 하지만 이 '시온'의 어원은 불분명하다. 다만 히브리어의 유사 파생어로 ‘바위’, ‘산성’, 혹은 '건조한 곳' 등을 의미하는 단어들만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시온산은 구약시대에 부르던 곳과는 다른 곳에 있다. 왜 현재의 장소가 시온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4세기 이후의 기독교 전승에 근거하면 이 위치에 세워진 ‘시온교회’때문이라고 추측되나 20세기에 와서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의해 이 주장이 잘못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가까이 이 산을 시온산이라고 불러 왔기에 지금도 유대인은 물론이고,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도 시온산으로 부르고 있다. ‘시온’또는 원래 그리스어로 영어가 된 ‘자이온’이라 불리는 이 곳은 예루살렘의 구시가 성전언덕에 보이고 맞닿아 있는 언덕이다. 보통 ‘시온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은 듬성 듬성 빈터가 보이고 또 도로는 언덕이라 굽어 있고 가파르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이 시온은 유대교와 유대인 그리고 이스라엘을 말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고 인용되는 말 중의 하나이다.

시온산에는 구 시가지를 통하는 문이 있는데 이곳이 예루살렘 8개 대문 중의 하나인 ‘시온게이트’이다. 이곳을 통과하면 예루살렘 구 시가지인 유대인 지구가 나타난다. 그래서 이 시온언덕은 사실 예루살렘 구 시가지 바로 바깥이지만 안쪽이라고 해도 무방한 곳이다. 이 예루살렘 구 시가지가 1948년에서 1967년, 그러니까 중동의 ‘6일 전쟁’까지는 요르단의 지배하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바로 지척의 성전산은 물론이고 서쪽벽인 통곡의 벽에 진입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서안(West Bank)지역을 편입 점령함으로 예루살렘의 구 시가지도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 이곳은 중요한 성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곳의 지하 감옥에서 하루를 보내셨고 그 집 밖에서 모닥불을 쬐던 베드로가 세 번을 배신한 후 닭 울음소리를 듣고 대성통곡했던 갈리간투성당이 있고 성모 승천당이 가까이에 있으며 그 옆에는 다윗왕의 가묘가 모셔진 회당이 있기 때문이다.
 

▲ 마가의 다락방에 설치돼 있는 올리브나무 형상의 조형물.     © 오종영(발행인)
 
마가의 다락방
시온산 출입구를 지나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물과 건물사이를 헤집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마가의 다락방이 있었다. 오순절의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던 곳 마가의 다락방 그곳에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간구했다.

시온산에 위치한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유월절 식사를 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건축물은 14세기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건물로 시온산 최후의 만찬실에서 발견된 유물이 간직되어 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3명의 여인에게 보이시고 여기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시면서 ‘샬롬’을 주셨다. 이곳에는 수많은 인파들로 붐볐다. 장소의 협소함도 이유이기도 하지만 순례객들의 관심을 받는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약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 받고 변화 받은 베드로가 이곳에서 수많은 군중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급기야 수 천 명의 사람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목회를 하다보면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만큼 부러운 이가 없는 것 같다. 이곳에 들어가니 올리브나무 형상으로 된 촛대가 있었다. 촛대에 올리브나무가 있는 이유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성령의 역사와 충만함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일행들은 촛대 앞에서 무릎 꿇기를 주저하지 않고 기도하기도 했다. 아마도 모두의 기도제목을 동일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성령의 역사와 충만함을 주옵소서!”라고 말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장을 눈으로 보고 도전받는 짧은 시간은 너무도 의미가 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무슬림들이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표식이 있어 무슬림인들의 방문도 많은 곳으로 초대 공동체 시대에 그 공동체를 좌지우지하는 큰 영향력을 마가요한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마가요한의 집으로 120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초대공동체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이 되었고 이곳에서 일어난 강력한 성경의 역사와 변화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하는 복음의 도화선이 되었다.
 
▲ 다윗왕의 가묘 입구 모습.     © 오종영(발행인)

다윗왕의 가묘
마가의 다락방을 나와 다시 향한 곳은 다윗왕의 가묘가 모셔진 곳이다.

이곳에는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표식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 설치된 촛대는 실제의 모형으로 순금으로 만들었고 안쪽에는 다윗왕의 가묘가 안치돼 있다.

건물 안으로 이동하니 랍비들의 복장을 한 이들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다수 진열해 놓고 책상 앞에 앉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맞고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니 다윗왕의 가묘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잠시 기념촬영을 한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 다윗왕의 가묘가 안치된 건물안에 있는 촛대     © 오종영(발행인)

참고로 시온산에 있는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Coenaculum)의 1층에 있는 ‘다윗의 무덤’은 십자군 시대 이후 다윗 왕의 기념 묘로 공경되기 시작했지만 그 기원은 초대기독교 공동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시고,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했던 이곳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면서 구원의 도시인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인 “시온” 즉, “거룩한 시온”으로 인식되기 시작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겐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시온”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가묘를 나와 왼쪽으로 이동하며 아랍이 차지했다가 부분적으로는 유대인이 차지해 토라와 율법교육 및 랍비양성을 했던 장소 등이 있다. 이제 산헤드린공회로 이동할 차례다. 거리에는 정통 유대인들이 모이고 있었다. 오늘저녁부터 안식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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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06 [15:12]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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