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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발행인 오종영 목사 성서의 땅 이스라엘을 가다 ④
오종영 목사/영성교회, 본지 발행인,대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오종영 기사입력  2018/05/14 [15:53]

▲ 본지 발행인 오종영 목사 성서의 땅 이스라엘을 가다     ©오종영(발행인)

이스라엘에서의 이틀이 지나갔다. 이제 조금씩 시차도 적응됐다.

갈릴리 호숫가에 소재한 호텔에서의 이틀을 보내고 아침 일찍 짐을 꾸리고 다시 일행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늘 일정에 앞서 지도를 펴 놓고 탐방지를 사전에 숙지해 놨다. 갈릴리호텔에서 출발해 벳샨 성에 들른 후 여리고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쿰란을 거쳐 맛사다에 들른 후 사해바다에 소재한 해로도스호텔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다.

다시 가이드 박정식 목사의 명품 가이드가 시작된다. 귀는 가이드 박정식 목사를 향해 열려 있고, 눈은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다.

이동구간에는 유대인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갈릴리호수가 있다. 호수이지만 아주 잔잔한 바다와 같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갑자기 풍랑이 일면 쉽게 어거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조금 올라가니 남요단강 발원지가 나왔고 멀리 헬몬산 정상의 하얀 눈이 보인다. 남요단강 발원지 오른쪽에는 세례 터가 있고 사람들이 여기서 세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곳이 아니라 쿰란근처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한다.

중부지역으로 이동하자 비옥한 땅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요르단 강 방향으로 가는 길목은 기름진 땅들이다. 우리는 이 비옥한 땅들을 관찰하면서 벳샨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가이드 박정식 목사는 사사들에 얽힌 이야기를 쏟아냈다. 박 목사는 이번 성서지리 탐방 일정 내내 新約(신약)과 舊約(구약)을 넘나들며 해박한 지식으로 도움을 줬다. 목회자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동질감을 유지하면서 일정 내내 아낌없는 해석을 이어갔다.

▲ 벳샨성의 모습.     ©오종영(발행인)

벳샨(Bet She’an)
드디어 벳샨에 도착했다. 이곳은 국립공원이다. 그리고 벳샨 성터가 있다. 지금은 파괴되어 어수선하지만 역사의 숨결이 잠들어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벳샨 근처의 길보아 산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사울왕과 그의 아들들이 이곳 성벽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성경의 기록이 남아있다(삼상 31장)

벳샨은 지리적으로 요단강 서쪽 5km, 갈릴리 호수 남쪽 25km지점에 있는 이스라엘 계곡 동쪽의 얄룻강 안에 있는 요새 성읍으로 오늘날 텔 엘 후슨이라 불리우는 폐구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해면보다 150m낮은 곳으로 애굽에서 북상하는 고대의 여행자들에게는 이스르엘 계곡을 지나 수리아, 다메섹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요단 입구에 대한 강력한 방어지이기도하다.

▲ 벳샨은 이스라엘 계곡을 지나 수리아, 다메섹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대이며 요단 입구에 대한 강력한 방어지였다.     ©오종영(발행인)

▲ 벳샨의 거대한 성터 모습 굵고 큰 돌기둥들이 로마시대의 건축물의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다.     ©오종영(발행인)

애굽의 투트모세3세는 므깃도 전쟁에서 이겼을 때에 이성읍도 점령하였다(BC1446년). 그 후 3세기 동안 벳샨은 애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거기에는 애굽의 수비대가 상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청된다. 이곳에는 애굽 외에도 블레셋, 이스라엘, 헬라, 로마의 유적이 포함되어 있었고, 로마의 극장도 있다. 벳샨은 여호수아 때 므낫세 지파의 지역으로 할당되었으나 철병거를 가진 이곳 거민들은 쫓아내지 못했다(삿1:7). 사울 왕 때에는 블레셋이 점령하고 사울의 시체를 벳샨 성벽에 못 박았다(삼상 3:10-12).

성터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거대한 로마시대 도시가 형성돼 있다. 이곳은 가이사랴 못지않은 거대한 도시이다. 참석자 일행은 이곳에서 “♬ 내 평생에 가는 길”을 합창했다. 그리고 조금 안으로 들어가 거대한 극장을 관람한 후 성터 안으로 이동했다. 전방 먼 곳 산 정상에 사울의 시신이 걸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표식물이 눈에 들어온다.

▲ 벳샨성의 모습(산 정상의 작은 표식물이 사울이 매달렸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종영(발행인)

▲ 벳샨의 유적지와 앞쪽의 산꼭대기 왼쪽에 사울의 시신이 걸렸다는 표식물이 보인다.     ©오종영(발행인)

물론 사울의 시체가 못 박혔던 성벽의 잔해는 보이지 않는다. 빼앗고 빼앗기는 쟁탈전이 반복되었으니 당연하다. 우리는 사울이 왜 그처럼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벳샨 성터는 많이 훼파되었으나 지금은 고대 로마의 거대한 성채와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규모도 상상이상으로 거대했다. 이곳은 인물학적으로 사울과 연결된 지역이나 건축학적으로는 로마의 유적지로 주요 석축은 갈멜산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그리고 고레코-로마 시대에 이곳은 스키토 폴리스라고 불렸는데 유대의 시리아 왕국의 동쪽 경계에 위치했던 10개의 주요 도시들(데카폴리스)중 하나로써 전성기를 누렸었다.

또한 비잔틴시대에 벳샨은 팔레스티나 세쿤다의 수도였으나 8세기 경 강력한 지진으로 파괴됐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로 로마의 대형극장, 로마-비잔틴 양식의 중앙도로, 거대한 돌기둥, 상점, 모자이크 및 텔(6000년의 정착기간 종안 새로운 거주자들이 층층이 쌓여서 형성된 언덕)등이 있다. 웅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의 규모에 한참을 바라봤다. 참 인상적이었다.

▲ 여리고에 있는 삭개오의 뽕나무로 실상은 무화과나무라고 하며 수령이 20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오종영(발행인)

여리고
벳샨을 나왔다. 이제 우리가 탄 버스는 여리고를 향했다. 여리고는 성경에서 구약에도, 신약에도 이곳과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고 있어 친숙한 지역처럼 느껴진다. 여리고로 가는 길 오른편에는 길보아산이 보이고 길보아산 정상에는 풍력발전소도 보인다. 바로 그곳에 실제로 사울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로마는 동-서로 연결되는 도로를 잘 닦았다. 주변에는 수많은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고 밭에는 밀이 자라 이삭이 영글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요르단이 조망된다.

벳샨을 지나면 아랍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있다. 왼쪽으로는 국경 철조망이 보인다. 그리고 요르단지역의 비옥한 땅도 보인다. 조금 더 지나니 아랍족속의 땅을 지나 척박한 민둥산이 펼쳐진다. 극과 극이다. 조금 전의 비옥한 땅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척박하고 가슴마저 답답하게 느껴지는 땅이다. 그러나 조금 더 지나니 왼쪽으로는 비옥한 땅이 다시 숨통을 트이게 한다. 그 곳에는 종려나무가 드넓은 땅에 심겨져 있다.

길갈지역을 지나갔다. ‘길갈’은 ‘굴려버렸다(수치)’는 뜻이다. 길갈을 지나 멀리 여리고가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차량으로 10여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여리고는 오아시스가 솟는 곳으로 해저400m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이 800m이니 1200m의 편차가 있는 셈이다.

▲ 여리고에 있는 엘리사의 샘(현재 엘리사의 샘은 건물안에 보존돼 있다)     ©오종영(발행인)

여리고는 헤롯이 별궁을 지었던 곳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지역이기도 하다. 1만여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는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곳으로 소개되어 있다. 여리고로 들어갔다. 여리고는 상당히 큰 도시이다. 그러나 생활수준은 매우 빈한한 지역으로 관광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요르단에서 일하는 가족들이 보내주는 돈이 경제적인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에는 요르단 등지에서 출입하는 차량동행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여리고로 들어가니 좌우 환경이 극과 극이다. 오른쪽은 민둥머리 흙산이 이어졌다. 그리고 중턱에는 요새처럼 수도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내일 들를 예정이다.

여리고는 1만년 이상 된 도시이다 보니 도시의 위치도 각 각 세대를 따라 다른 장소가 세 곳이나 있다. 구약시대 여리고의 폐허는 팔레스틴 최대의 샘이 있는 아인에스술탄의 수원 가까이 있다. 이는 ‘엘리사의 샘’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엘리사의 샘이 구조물 안에 위치하고 있고 물 근원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다 켈트’는 신약 시대의 여리고 또는 ‘헤롯의 여리고’라고 부르는데 현재의 여리고시로부터 서남쪽으로 1.6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헤롯왕에 의해 세워진 여리고는 고고학적 흔적만이 남아 있지만 그곳은 예수 당시 장대한 도시였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암만에 이르는 도로변에 있는 소도시이지만 작은 언덕을 둘러싸고 상당히 넓게 펴져 있다. 카메라 앵글로 담아보려고 했지만 여러 번 나누어 셔터를 눌러야 했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다. 도시도 큰 건물은 보이지 않고 고만고만하다. 우리는 그곳 언덕에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과일을 파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이스라엘의 관광지 어디에가도 늘 볼수 있는 시원한 석류과즙으로 갈증을 해소하며 잠시 동안의 휴식을 취했다.

여리고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입성하려고 할 때에 여호수아에 의해 처음 공격당하여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함락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성의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었다가 구원받기도 했다(수2:1-21, 6:17, 22-25). 그리고 신약에서 세리장이 삭개오가 회개한 곳으로 여리고 시내로 들어가면 중심부에 뽕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무화과나무라고 한다. 현재 수령이 2000년 정도 됐는데 거주인들은 대부분 이슬람인 들이고 극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 여리고에서 쿰란으로 이동하던 중 우리 일행이 들렀던 아랍계 레스토랑     ©오종영(발행인)

쿰란 국립공원
여리고에서 나왔다. 어느덧 배가 출출해 진다. 점심시간이 된 모양이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쿰란을 향해 가다 중간에 주유소 옆에 있는 아랍계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한 후 쿨란으로 이동했다. 쿰란은 ‘함께 숨어 지낸다’는 의미이다. 이동시간은 약 2-30분 정도의 거리에 소재해 있다. 이곳은 성서지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분류되고 있다. 특별히 이곳은 사해사본이 발견된 장소로 신·구약중간사(암흑기)의 역사와 관련된 곳이기도 하다.

쿰란은 주전1세기 경 사해의 북서부에 있던 마을로 사해사본을 쓴 에세네파 공동체가 있다. 이 문서는 2000년 후인 1947년에 근처 동굴에서 발견됐다. 대부분의 두루마리들과 그 조각들은 이스라엘 박물관의 책의 전당과 록펠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청동 두루마리는 암만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 사해사본이 발견된 곳 쿰란, 이곳은 에세네파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다.     ©오종영(발행인)
▲ 쿰란 유적지 모습( 사진 상단 가운데에 큰 물길의 흔적이 나 있다)     ©오종영(발행인)

현재는 페허 속의 주 건물은 폭27m, 길이 44m정도로 석고가 거칠게 발라져있는 큰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북쪽에는 수비탑이 있으며 부엌과 붙어 있는 식당에서는 1000여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주 건물 주변에는 용기장이 집, 방앗간, 염색집, 7개의 저수탱크 등이 발견되었다. 쿰란 주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10개이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쿰란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는 사해가 펼쳐져 있다. 사해도 남 사해와 북사해로 나뉜다. 사해바다 위에는 소금기둥이 둥둥 떠 있다. 쿰란은 구약시대에 에세네파 사람들이 살던 곳이고, 세례요한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는 성장했고, 세례식을 거행하며 ‘회개’를 축구하기도 했다.

▲ 쿰란에 전시되어 있는 사해 사본     ©오종영(발행인)
▲ 쿰란의 유적발굴 현장 모습     ©오종영(발행인)

쿰란은 사해 맞은편에 소재해 있어 우리 일행은 쿰란에 도착한 후 영상물을 시청하면서 세례요한과 다른 요한의 사역과 당시 공동체의 삶을 이해하며 헤롯왕에게 처형당했던 세례요한과 다른 요한, 빛의 공동체에 대한 기록을 시청했다. 즉 이곳은 쿰란공동체가 살던 곳으로 구약의 에세네파가 메시아를 기다렸던 곳이다. 에세네파는 예수님 오시기 100년 전부터 이곳으로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이곳에서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오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박정식 목사와 함께 에스겔47장을 읽었다. 그리고 박정식 목사는 가이드를 했다. 박 목사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새삼 에세네파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갔다.

이들은 지금 사해에는 물고기가 산 흔적이 없으나 사료에는 물고기를 잡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당시 사해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메시야 만날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메시야는 이곳으로 오시지 않았다.

▲ 마사다 입구에 있는 이정표.     ©오종영(발행인)

마사다 국립공원
마사다는 ‘방어하기 좋은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해 서쪽 해안의 고원에 지어진 헤롯의 웅장한 궁전과 요새가 있다. 이곳은 주후 73년에 960명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전하다 집단 자결한 역사적인 장소로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에는 하스본 왕조 때에 도피성을 건설한 흔적이 있고 헤롯은 여기에 요새를 만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마사다는 주후 68년에 반란이 일어났고, 꼭대기에는 비잔틴 시대의 문화재가 있다.

사전에 보면 마사다는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유대인들이 로마군에게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곳으로 사해(死海) 남동해안 부근에 있는 평평한 곳 맨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 마사다 정상에 있는 유적지 모습과 멀리 북사해의 모습이 보인다.     ©오종영(발행인)

배처럼 생긴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약 4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의의 유대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34m의 높이 이 천혜의 절벽 바위 요새는 정상이 길이 630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 평균 120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제1성전(솔로몬 성전, BC 900경) 때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 헤로데 대왕(BC 37~4 재위)의 궁전과 요새들 그리고 AD 72~73년에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한 사건 때문이다.

▲ 마사다 정상에 있는 헤롯의 웅장한 궁전과 요새가 있던 터, 이곳에서 960명에 로마에 항전하다 자결을 하게 된다.     ©오종영(발행인)

▲ 마사다에서 내려다 본 주변 전경.     ©오종영(발행인)

맨 처음 이곳을 요새로 만든 사람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알렉산더 얀나이우스(BC 103~76 재위)이지만, 그 후 마사다를 건설한 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헤로데였으며, 그가 남긴 건축물들 가운데는 화려한 궁전 2채, 두터운 성곽, 약 75만L나 되는 물을 저장하는 물탱크들에 연결된 수로(水路)들이 있다. 이곳은 AD 66년 로마의 지배를 완강히 반대하던 유대교 분파인 '열심당'(Zealots:혁명당이라고도 함)이 기습공격으로 점거한 곳이다.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 전쟁사’를 통해 마사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헤롯이 죽은 뒤 주후66년 유대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는 끝을 맺게 되었고,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여명의 민족주의자들은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여 로마에 대항했다. 마사다에는 엄청난 양의 식량과 물,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황제는 이들을 쳐부수도록 명령을 내렸고 로마군은 성의 사방 8곳에 주둔지를 정하고 마사다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러나 사막과 다름없는 들판을 건너와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대항할 수 없었다.

▲ 마사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주의 전경(수많은 구릉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열심당원 960명이 로마군의 공격 때 자결을 했다.)     ©오종영(발행인)

이에 로마의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은 군수품의 보급이 어려운 로마군에게 불리한 전쟁이라고 판단하고 마사다의 서쪽 벼랑에 있는 희고 넓은 바위에 인공능선을 쌓고 공성탑을 만든 후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들이 활을 소며 엄호하는 사이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를 끌어 올렸고 투석기에서 날아간 20Kg이 넘는 돌들은 마사다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이에 그날 밤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는 남자들을 모두 한군데 불러 모으고 “자유란 이름으로 수의를 입자”며 자결을 유도하는 연설을 하고 남자들이 가족들을 먼저 죽이고 10명중에서 한명을 뽑아 그가 나머지를 죽인 후 마지막 한 사람이 자결을 하여 73년 4월 15일 마사다에서 저항하던 960명이 모두 숨졌다.

마사다는 2세기에 유대인들이 잠시 탈환한 일이 있고 5~6세기에는 비잔틴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그 뒤 십자군들이 잠시 차지한 시기를 제외하면 20세기까지 방치되어 아랍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저주받은 곳’이라고 불렀다. 20세기에 마사다는 유대민족의 용기의 상징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이곳을 손수 걸어서 오른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마사다에 들러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이동했다. 중간 중간을 관측해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손수 걸어서 마사다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쉽지 않은 경로이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직접 오르지 못하고 케이블카를 이용해 손쉽게 정상에 오른 우리보다는 경험적 측면에서 마사다의 전투를 깊이 있게 느끼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우리는 케이블카에서 내려 정상으로 조금 걸어 올라간 후 마사다 정상에 건설된 당시의 유적지들을 관람하며 아득한 꼭대기에서 사해를 조망했다.

▲ 마사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사해의 모습(중간 중간 소금덩어리가 떠다니고 있다)     ©오종영(발행인)

마사다에서 내려온 우리 일행은 오늘 묶을 南(남)사해에 소재한 해로도스호텔을 향했다. 사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南(남)사해와 北(북)사해로 나뉘어져 있다. 北사해는 수심이 100m에 달하지만 南사해는 수심이 4m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재는 사해물을 끌어다 각종 상품을 만들다보니 사해물이 많이 증발됐고 이에 지중해 물을 끌어다 쓰려고 하지만 몇 백년이 걸릴지 몰라 사해의 보존을 위한 대책도 묘연하다고 한다.

해로도스호텔에 도착했다. ‘해로도’라는 용어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대충 이해하시리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헤롯이라는 이름은 부정적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건축학적인 면에서나 리더십의 측면에서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숙소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숙소에서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고 사해바다에 몸을 맡기고 사해체험을 하며 셋째날 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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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14 [15:53]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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