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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권원호 목사의 독립투쟁과 순교신앙 3
임청산 목사(세종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보도1국   기사입력  2018/02/26 [14:20]
▲ 임청산 목사(전 공주대 학장)     ©편집국
그해 9월에 고성교회 인근의 고성읍 동리 568번지로 이주하여 처가의 도움으로 같은해 12월부터 기계 제면업을 시작하여 4년간 생계를 꾸려가면서 기업을 일궈보려고 힘썼다.

권원호 열사는 고성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하면서 신성회(神聖會)를 조직하여 청장년들과 함께 문맹퇴치와 태극기 보급에 힘썼다. 그는 주일에 상점을 닫고 교회생활에 전념하면서 목회 활동을 서원했다. 1935년 5월 7일 그는 35세에 장녀 성열(成烈)을 낳아 기뻐하면서 슬픈 일도 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1936년 7월 28일 고성지역에 대홍수가 일어나 제면기계를 비롯한 가재도구를 모두 떠내려 보내고 가족들의 생명만 건졌는데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서 오갈데 없는 그의 가족들은 이진구 목사의 사택 방 한 칸을 빌려서 임시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신앙생활에 헌신하고 애국 애족의 독립운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 권원호 목사의 원산지방 교역자수양회 기념사진 (금강산 온정리, 1940. 8. 5, 후열 좌측의 여섯번째)     © 사진제공:임청산 목사
 
Ⅲ. 순교자 권원호 목사의 신앙과 유훈
1936년 한 여름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수재를 당하여 생계가 위협을 받았을지라도, 권원호 전도사는 교회 일에 전심전력했다. 그는 담임목사가 지역교회를 순회할 때에 본교회의 예배 설교와 심방 활동을 맡았고, 주일 학교와 청년회도 신앙생활과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대가 굵고 목청이 고와서 그의 설교와 찬송이 교인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다.

마침내 1936년 9월 24일 고성구역 장전예배당에서 개최된 제6회 원산지방회에서 그가 고성구역 신천 전도사로 임명되어 담임목사를 도와 정규 목회자로서 교역활동에 힘쓰게 되었다.

권원호 전도사의 활동으로 청년들이 교회로 몰려나오자, 일본 경찰들은 은근히 반감을 품고 감시를 늦추지 않으면서 박해를 일삼았다. 그가 김윤식(金允植) 권사의 방에 갔을 때, 신문에 게재된 “조선청년의 노래”를 수첩에 베껴서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청소년들에게 은밀히 가르쳐주었다. “굳센 힘 용감함은 우리의 것/ 세상일 모두 막지 못할 것 없다./이천만 한맘 되어 횃불을 높이 들고/ 조선 천지를 밝혀보자.”(조선청년의 노래 2절)에서 조선의 청년들이 일제의 압제에서 현실을 뛰어넘어 횃불을 들고 일어나면 다시 조선이 독립할 것임을 강조했다.

1937년 원산지방회에서는 7개 교회로 조직된 협곡구역과 6개 교회로 조직된 통천구역에 목회자가 부족하여 파송하지 못 하였다. 이에 이진구 감리사는 1937년 6월 1일에 강원도 통천군 협곡면 명고리 42번지 협곡교회로 권원호 전도사를 파송하였다. 그는 협곡교회에 부임하여 하나님과 나라 사랑에 대한 마음을 가득 담아 은혜롭게 설교하였다.

1937년에 일제는 전국 대도시를 비롯한 시골교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해 12월 통천경찰서 협곡지서의 형사가 권원호 전도사를 찾아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권 전도사는, “기독교의 십계명에는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것이 첫째 계명이오. 인간이 만든 것은 모두 우상임으로, 나로서는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며칠 후, 통천경찰서장의 출두 명령이 내려와서 권원호 전도사는 수십리 길을 걸어서 경찰서에 도착했다. 경찰서장은 그를 몹시 질책했다.

“대일본 신민은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 앞으로 만일 참배를 거절한다면, 그 때는 용서할 수 없다.” 경찰서장의 책망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껴야했다.

1938년 4월에 권원호 전도사는 서울의 감리교신학교에서 3개월간 신학강습을 받고 목사 안수를 준비했다, 수강 중에 그는 성경에서 “예수 재림이 유대국의 신관으로서 말세가 지나면, 예수는 재림하지만, 말세가 되면, 흉년, 전쟁, 온역 등이 유행하게 된다”는 말세론을 듣고 성경을 깊이 탐독하게 되었다.

▲ 권원호 목사의 기념수건과 인장 (1939. 7. 15) 금강산 손수건의 유품 (1941. 8. 5)     © 사진제공:임청산 목사

1939년 5월 3~10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7회 연합연회에서 권원호 전도사는 원산지방 회양구역으로 파송받아 6월 1일에 강원도 회양군 회양면 읍내리 561번지의 회양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군청과 경찰서가 가까워서 일경의 감시와 박해가 너무나 심하여 목회자들이 꺼리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원하여 파송을 받았다.

권원호 전도사는 6개 교회를 순회하면서 말세를 살아가는 신도들에게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일경의 감시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교인가정을 심방했다. 권 전도사는 ‘일경의 박해가 심하다는 것은 일본의 패망이 가까웠다는 증거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민족을 깨우고 정신을 가다듬게 해야 한다’는 신념과 주장이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와 심방에 힘쓰면서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교회봉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0년 8월부터 권원호 전도사는 민족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기위해 “예수재림,” “신사참배문제,” “구주탄생”, “무주공산 삼천리”, “유태인” 등의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일본이 아무리 무력으로 조선을 압박해도, 국가와 민족의 운명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고, 심지어 일왕조차도 예수의 지배 아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설교를 매번 외쳤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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