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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권원호 목사의 독립투쟁과 순교신앙 2
임청산 목사(세종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보도1국   기사입력  2018/02/09 [15:25]
2. 독립투사 권원호 열사의 생애와 사상
권원호 열사는 1904년 음력 8월 5일(양력 9월 14일)에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인유리에서 과수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던 권옥린(權玉麟) 장로와 이옥심(李玉心) 집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에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스리하여 조선에 대한 지배권이 강화되고 을사늑약(1905. 11. 17)을 체결하여 각종 이권을 챙기면서 국권을 침탈하였기에 구한말 조선인들의 앞날이 암울하던 때였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권원호 열사는 부모를 따라서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심을 기르고 나라를 걱정하던 부모의 영향으로 애국심이 싹트게 되었다. 특히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가족기도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드리는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는 신앙적 가치관과 애국적 동포애를 기르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11년 4월 8세인 권원호 열사는 중화읍장로교회에서 운영하는 경의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최(崔)선생을 만나서 학업과 신앙을 지도 받았다. 최 교사가 가르쳐준 역사와 지리는 깊은 깨달음으로 평생 간직하면서 그의 애국애족심을 불태우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교회의 부흥회와 학교의 강연회에서 망국의 한을 풀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3년 과정을 마친 후 그는 마을의 한문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익히면서 독립운동의 꿈을 길렀다.

1918년 9월에 부친 권옥린 장로가 갑자기 별세하자,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권원호 열사는 과수원을 비롯한 농업에 종사하면서 모친과 형제들을 받들어야 했다. 이듬해인 1919년 3월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 열사와 비슷한 또래인 열여섯 살의 그가 10여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평양의 만세운동에 참여하던 중에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산속으로 피신하여 ‘기독교 신도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면서 결의를 다졌다.

1919년 3·1운동 반년후인 9월 5일 중화읍장로교회에서 권원호 열사는 평양부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선친의 뒤를 이어 그는 교회 봉사에 힘쓰면서 평양시내의 기독교계 동절기 야학반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그는 20세가 되던 1923년 2월 17일에 중맬로 평양시 주교리 25번지 서촌의 부유한 신앙가정인 윤관호(尹寬浩)와 황선옥(黃善玉) 집사의 장녀인 윤순덕(尹順德) 규수와 결혼하여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다.

▲ 권원호 목사의 독립유공 포상을 미망인 윤순덕 여사가 대리 수훈(1983. 8. 31)     © 사진제공:임청산 목사

신부 윤순덕은 1906년 8월 16일생으로 신랑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그녀는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아 16세에 입교했는데, 조선의 유명한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시 사창동장로교회에서 봉사하였다. 그녀의 신앙을 눈여겨 본 김 목사가 직접 소개하여 성혼되었으니, 가히 믿음의 가정이 아닐 수 없었다. 불행히도 3년만에 낳은 아들 세환(世煥)과 그 이듬해에 낳은 딸 시화(施花)조차 각각 돌이 지나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제가 지주들의 토지를 수탈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이 빈궁해지면서 만주나 간도 지역으로 유랑의 길을 나서게 되자, 권원호 열사도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1927년 1월에 처음으로 그는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지하리로 이주하였다. 낯선 곳에서 그는 잡화상을 경영하고 소작농으로 초원을 개간하면서도 농민들에게 선진 농법을 가르쳐주다가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해의 수확을 마친 11월에 두 번째로 권원호 열사는 황해도 신계군 사지면 막대리 주은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2년 후인 1929년 11월 16일 자신처럼 기골이 장대한 장남 성준(成俊)을 옥동자로 낳아 기뻐했다. 2년간 그는 주은동감리교회에 다니면서 야학을 개설하여 청년들에게 농촌운동의 일환으로 농사강습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독립심과 민족정신을 일깨워주었다.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1930년 3월에 권원호 열사는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추동리로 이주하여 이진구 목사가 시무하는 고성감리교회를 섬겼다. 그는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서 청소년들에게 배일사상과 애국정신을 심어주었다. 또한 담임목사가 출타할 때에는 예배인도와 설교를 담당하여 경천애인의 신앙심을 북돋아주고 애국애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켜주고자 전력을 다했다.

그당시 권원호 열사는 기독교계 학교였던 덕성학원의 교사로 부임하여 1년간 젊은이들에게 신앙교육은 물론, 자주독립의 민족정신을 불러일으켜주었다. 어느 날 동료 여교사인 김진(金眞)의 창가집에서 ‘조선의 아들’, ‘인산곡가’, ‘애국가’등을 공책에 옮겨 적어서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청소년들에게 은밀히 가르쳐주었다. 그들이 자라서 농촌을 개발하여 식량을 해결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여 국권을 회복하도록 힘썼다.

권원호 열사는 학생들과 함께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피 이 뼈는/살아 조선 죽어 조선, 네 것이로다/에야 데야, 우리들은 조선의 아들/두팔 걷고 달려갈 조선의 아들”(조선의 아들 1절)을 가슴 조이며 부르고 불렀다. 특별히 개사한,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에/원산지역 고성교회 영구 보전하세”(애국가 후렴부분)을 고쳐 불러 기독학생들에게 사기를 진작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일경에 알려져서 그는 1931년 3월 재직한지 1년만에 덕성학원 교사직에서 권고 사직을 당해야만 했다.

퇴직 후 소작농으로 종사하던 권원호 열사는 조선 독립을 소망하면서 “교원생활 1년”이라는 한시를 18절 32구로 지어 설움을 달랬다. 그 내용은 공명정대한 세상을 염원하여 예수의 재림을 신앙하고 조선의 독립을 기원했다. 그는 신경쇠약으로 반년간 황해도 신계에서 요양하던 중에 1932년 5월 ‘자식으로 인하여 상심에 빠진 어머니’이옥심 집사가 하늘나라로 떠나는 슬픔까지 당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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