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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권원호 목사의 독립투쟁과 순교신앙 1
임청산 목사(세종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보도1국   기사입력  2018/01/29 [15:37]

▲ 사진)권원호 목사의초상화(1960년대 제작)     ©사진제공:임청산 목사

열흘간의 추석 연휴에 우리 가족은 뜻밖의 소식을 듣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2층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는 5,000여명의 수형인 명함판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어서 장인어른의 사진을 찾기가 어려웠다. 한 구석 반 칸에 섬뜩한 집행장과 시구실에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17인의 독립투사들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 신사참배를 반대한 치안유지법 위반죄(1942)와 옥중에서 항거한 불경죄로 체포, 구금, 투옥, 고문 등 일제의 모진 악형에 시달려 옥사 순교한 장인어른 권원호(權元浩), 1904~1944)목사의 실사 영정을 한 눈에 발견했다. 친지의 단체사진에서 본뜬 초상화만을 보면서 자라난 유복녀인 아내 권성숙(權成淑) 장로가 76년 만에 당시 촬영된 아버지의 수형 사진을 난생 처음 어루만져 보면서 감격하여 오열했다.

일제 말기에 권원호 열사는 평안남도 중화를 비롯한 강원도 고성과 회양에서 행한 농춘계몽 운동, 애국심 고취, 복음전파로 인해 옥사 순교하였다.

해방 후에 공산독재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월남한 미망인 윤순덕(尹順德, 1906~1986)여사를 필자가 15년간 모시고 살면서 친일파의 후손들에 반하여, 독립투사의 자손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는지를 몸소 체감해 왔다. 늦게나마 독립투사에 대한 독립유공 애국지사의 수훈(1983)과 정부기관의 공적추모비 건립(1988)과 재판기록에 의거한 독립투쟁과 순교신앙 전기집『마라나타』출판(1990)으로 고인의 독립운동과 신앙활동이 공인되어 조금이나마 통한을 풀게 됐다.

왜정 당시의 시대상을 약술하면,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순국선열의 날)에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강권적으로 1910년 8월 29일(국치일)에 한일합방하고 국권을 찬탈하여 1945년 8월 15일(광복절)까지 36년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세 단계의 철권통치를 통해 조선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점진적으로 가중시켰다.

첫 단계는 1910년대의 무단 통치기간(1910~1919)으로 조선의 식민통치를 헌병 경찰제로 무단통치를 일삼았다.

둘째 단계인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간(1920~1931)에는 1919년 3·1독립 만세운동이 전환점이 되어 일제가 식민정책을 문화통치로 전환하고 민족분열을 획책했다.

셋째 단계인 1930년대 이후부터 일제가 패망하기까지의 군국주의 통치기간(1932~1945)에는 대륙침략의 야욕을 노골화 하여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으로 전시체제를 전환하고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켰다가 패망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본격적인 제국주의 체제로 전환하여 조선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극심했다.

▲ 권원호 목사의 실제 사진 액자와 필자 내외 방문(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사형집행실, 2017, 10,8)     © 오종영(발행인)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1910년대에 무단통치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 정찰제도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조선을 완전 식민지화하려고 획책했다. 1920년대에는 문화통치로 지주+지식인+종교인 가운데서 친일파를 육성시켜 민족분열 정책을 꾀했다.

1930년대 일제 말기에 군국통치로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아 인적+물적자원을 수탈하는 단말마적인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했다. 일제가 식량을 약탈하여 절반의 농민들이화전민(산속), 노동자(일본시장), 소작농(만주)으로 유랑하게 됐다. 게다가 전쟁물자로 전용하기 위해 각종 지하자원, 기름, 놋쇠그릇, 곡식 등을 약탈해갔다. 전쟁수행을 위한 약 500만명의 조선인과 약 50만명의 청년 자원을 ‘근로보국, 근로동원, 여자정신대 근무령’으로 강제 징병+징용+동원을 하고, 심지어 여성들까지도 군수공장의 노역과 군대위안부로 끌어가 학대하는 잔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내선일체화하려는 민족말살 정책을 강제로 펼쳤다. 1939년부터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일본어와 일본사를 교육하고, 조선어문 사용을 금지하고, 한글로 된 신문 잡지까지도 폐간했다. 그들의 태양신 천조대신과 제국의 우상인 일왕을 섬기도록 황국신민서사의 선서와 궁성요배를 강요했다. 무엇보다도 일제는 종교단체법을 제정하여 민족종교를 통제하고 신도들을 탄압하려고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했다. 심지어 일본식 기독교로 만들고자, 기독교 목회자와 신도들을 체포하여 불법 구금하고 투옥시켰다.

이러한 일체의 행위는 조선인의 혼을 빼내서 일본인의 정신을 심으려는 민족말살정책이었다.

원래,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池靑天)장군을 비롯한 6인의 제안에 따라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망국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지켜왔으나 6.25전쟁 후에 제정된 ‘현충일’에 통합되어 유명무실해지자, 독립유공자를 비롯한 애국애족 인사들의 분리 요구가 비등하였다.
 
이에 따라 1997년부터 11월 17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켜온 ‘殉國先烈(순국선열))의 날’을 상기하면서 일제강점기의 민족말살정책과 박해탄압을 정리하였다. 아울러 독립투사 권원호 열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순교자 권원호 목사의 순교신앙과 유훈을 살펴서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투쟁과 신앙활동을 후세에 같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고자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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