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ㅣ칼럼 > 금주의말씀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하란에서 머물지 말고 가나안으로 떠나자!(창 11: 31-12:9) 156호
류명렬 목사/대전남부교회
 
편집국   기사입력  2017/11/17 [16:06]
▲ 류명렬 목사 / 대전남부교회     ©편집국
1678년 존 번연(John Bunyan)은 옥중에서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라는 책을 완성하였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찬(Christian)은 성경을 한 권 가지고 자기 고향인 멸망의 도시를 떠나 천성을 향하여 가는데, 그 길 가운데 낙심과 절망의 늪도 지나고, 허영과 교만의 거리에서 방황도 하고, 죽음의 계곡도 지나 천신만고 끝에 천성에 도착합니다. 그 여정을 그린 이야기가 천로역정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저 천성을 향하여 우리도 나아가고 있는 우리의 여정은 어떤가요? 혹 절망과 낙심의 늪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혹 허영의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의 길을 돌아보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잃지 않고, 또 중도에 포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유브라데스 강 근처,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데 이곳은 우상숭배가 번성하던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아브라함은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다른 섬겼던 사람들이었음을 말했습니다.(여호수아24:2)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아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부르신 것입니다.

순교자 스테반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테반은, 중요한 사실을 말하는데,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오늘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하란에서가 처음이 아니고, 갈대아 우르에 있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스테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게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사도행전 7:2-3)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에, 메소보다미아, 즉 그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그는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우상숭배의 자리,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 그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으로 향하여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창세기 11: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불신앙의 자리에서, 나태와 게으름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우상숭배와 불신앙의 자리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도 부르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고통과 슬픔의 자리에서 기쁨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2. 이 부르심의 길에서 포기하여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가다가 포기하고 더 이상 전진하지 않습니다. 하란에 머물러 살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가는 중간 지점인 하란에 도착하고, 거기서 많은 소유를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동원한 자기 사람이 318명이라는 것을 볼 때에, 아브라함의 소유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란에서 아브라함은 부요한 삶을 살았고,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 1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은 단순히 물질적인 축복이나, 세상의 성공으로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함을 위함이요(살전4:7), 육체의 방종이 아닌 사랑의 섬김을 위한 것이요(갈5:13),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려 하심(딛2:14)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어정쩡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으로 가야 하는데, 그 중간인 하란에서 머물러 떠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너는 그곳을 떠나라” 말씀하셔도 떠나지 않습니다. 이미 배가 불러 있고, 이 세상의 대체품, 모조품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의로운 삶으로 떠나야 하는데 ‘자기 의’를 자랑하며 살고 있고, 충성처럼 보이지만, ‘자기 과시’를 충성처럼 꾸며 충성한다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신 축복이 너무 많아서 못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너무 많아 몸이 무거워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축복 속에 숨어서 하나님이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존 번연은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이 세상은 장망성((將望城)!, 즉 장차 망할 성(City of destruction)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따라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길을 떠나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는데 하란에서 머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일어나 말씀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3. 우리는 삶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이곳은 이후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곳입니다. 축복의 땅, 약속의 땅이었지만 아브라함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당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레’라는 말은 ‘가르치는 자’라는 의미의 말인데 상수리나무 앞에 모레라는 말이 붙은 것은 이 상수리나무가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가나안 사람들은 우상을 섬겼고 그 우상의 가르침을 상수리나무에게서 얻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모레 상수리나무라는 말을 명확하게 기록한 것은 그 뒤에 대조가 되는 아브라함의 행동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7절과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 우상 숭배의 땅인 가나안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8절 하반절)

아무도 그 땅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다 상수리나무 아래서 우상 숭배를 할 때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믿음의 길에서, 부르심의 길에서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과 시련과 유혹을 만나게 됩니다. 있는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삶의 관성의 힘이 우리를 부르심에 따라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나태와 게으름의 자리에서 우리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끌어 당겨 버립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함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나태와 게으름의 자리, 익숙함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기독타임즈 ⓒ무단전재 공유언론사, 협력교회 및 기관 외 재배포 금지
대전충청지역 대표 기독교주간신문사 기독타임즈(kdtimes@hanmail.net)
운영이사장=정민량 목사ㅣ 발행인=오종영 목사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7/11/17 [16:06]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