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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관문을 지키며 영혼을 일깨우는 말씀사역자’ 신대동교회 김명기 목사
 
보도1국   기사입력  2017/04/14 [14:54]
▲ 본지 발행인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명기 목사     © 오종영(발행인)

대전시 대덕구 회덕로 21번길 71(신대동)에 소재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대동교회(통합교단 소속)는 26년 전인 지난 1991년 6월 28일 김명기 목사 가정과 8명의 성도들이 모여 30여평의 조립식 성전에서의 첫 예배를 시작으로 대전의 또 하나의 교회로 태동했다.

신대동교회는 대전의 끝자락이랄 수 있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대덕구의 관문을 굳게 지키고 있으며 담임 김명기 목사는 영혼구원을 위한 열정으로 뚝심 있는 목회 사역 뿐 아니라 그가 속한 교단인 예장통합 대전노회장을 비롯해 대전신학대학교 이사 및 강사, 성서신학원 원장, 노회유지재단이사장, 서울장신대 이사 등으로 섬기면서 리더십의 영향을 외부에 까지 끼치고 있는 목회자이다.

오는 6월이면 정확히 26년을 맞이하게 되는 신대동교회는 지금은 500여명의 등록성도와 매주일 400여명의 출석성도들이 함께하는 안정적인 교회로 성장했으나 개척초기의 환경은 결코 녹록치 만은 않았다고 고백한다. 이제 경부선과 호남선을 연결하는 인터체인지 신설로 인해 신대동지역은 새로운 개발계획이 수립되었고 개발계획이 실행되면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게 된다. 이에 신대동교회는 확장되는 주변환경과 유입세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맞아들일 사역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에 김명기 담임목사를 만나 보았다.


▣ 신대동교회는
현 신대동교회는 본래 대전영락교회가 개척 후 예배를 드렸던 곳으로 대전영락교회가 부흥함으로 인해 법동으로 이주한 후 평양노회에 소속된 대전한밭교회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1991년 6월 28일 당시 금산 군북교회에서 목회하던 김명기 목사가 8명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신대동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현재는 등록교인 500명에 출석교인 400명의 교회로 성장해 노회 안팎으로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으나 26년의 세월 속에 묻혀있는 숨은 이야기들도 많다. 김 목사는 신대동교회에 부임개척을 시작한 후 무엇보다 전도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목회를 시작했다. 그가 CCC맨이기에 CCC에서 받은 훈련과 지금은 이단으로 분류됐으나 한때는 남다른 열정으로 전도훈련에 집중하며 한국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다락방 전도에도 심취한 적이 있었으나 이단시비가 있은 후 방향전환을 했다. 김 목사는 말하기를 신대동교회의 장점은 무엇보다 “뜨겁게 기도하고 찬송하는 교회로 교회주변 특성상 기도원에 갈 필요 없이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을 해도 주변에서 돌멩이 하나 날아온 적 없는 교회”라면서 교회가 밭 가운데 세워진 교회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열정은 지금도 계속돼 신대동교회의 담벼락에는 현수막이 끊기는 날이 없으며 기도회를 통해서 성도들이 교회와 밀착된 삶을 살게 되고 그분들이 전도를 하면서 교인들이 하나, 둘 늘어났고, 이후에는 전도팀을 만들어 전도하면서 교회가 꾸준히 성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신대동교회의 전도열은 주변의 반응이 대변하고 있다. 교회 안팎으로 전도열풍을 일으키자 주변의 교회들이 공동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발생했으나 전도의 열심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개척 초기 중고 조립식 건물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의자도 적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새는 탓에 양동이를 놓고 예배를 드릴 정도로 어려움도 많았으나 끊임없는 기도와 전도가 오늘의 신대동 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 김명기 목사의 개척일기
개척 초기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교회를 찾아왔다가도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고 이동하는 일이 많다보니 연륜이 있는 교회에 비해 소속감이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김 목사는 “개척초기에 이런 환경적인 문제로 인해 외부성도들을 포용하고 따뜻하게 맞아해 줄 수 없는 환경이었으나 이후 교인숫자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문제들이 사라지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대동교회는 초기에 장로를 세울 때 다소 많은 수(9명)의 장로를 세웠는데 장로 된 사람들이 대부분 기성교회에서 온 사람으로 성도들과 융화되지 못했고, 심지어는 김 목사의 목회철학과 방침에도 반기를 들고 떠난 사람도 있었으나 이내 김 목사의 본심을 이해하고 든든한 목회의 동역자로서 협력을 하게 됐다. 김 목사는 말하기를 “그 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 때 떠나셨던 장로님들과 애경사도 서로 챙길 정도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개척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교인문제, 물질문제, 목회자의 자질 문제가 목회에 큰 고비로 작용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 신대동교회 김명기 목사     © 오종영(발행인)


▣ 김명기 목사의 신앙과 사역일기
김 목사는 충북 미원 출신으로 그곳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했다. 그의 고모들이 모두 교회에서 교사로 섬겼고 조부모 때부터 교회를 섬겨온 3대 신앙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고등학생 시절 중병을 앓고 사선을 넘나드는 어려움을 겪게 됐는데 그때 그의 조모는 김 목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시는 것일지도 모르니 주의 일을 할테니 살려 달라며 기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목사의 어렸을 적 꿈은 판사였다. 그러나 조모의 말에 따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질병에서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으며, 그 후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할머니께서 너를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 서원기도를 하셨는데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신 것 같다”고 말한 후 추천서를 써주자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전신학교(현, 대전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 후에는 청주 청남교회를 다니면서 신앙교육을 받았으며 전도사고시를 치르며 목회자로서의 준비를 갖춰 나갔다.


▣ 국내·외 수 십 개의 교회 및 기관, 학교 사역 등 다양한 선교사역 펼치는 신대동교회
신대동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모토로 지금까지 교인들과 1년에 한 차례씩 해외선교, 국내선교를 병행해서 실시하고 있다. 국내사역으로는 매년 8월 15일이면 전교인들이 농어촌 지역을 방문해 농활, 의료봉사, 지역민을 위한 문화공연 등의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같은 지역에 소재한 어려운 교회를 섬기고 부흥회, 전도집회를 실시하며 돕고 있다.

또한 해외봉사 활동으로는 중국, 일본,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남아공 등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김 목사는 1년에 한 번씩 성도들과 직접 선교지를 방문해 사역을 펼치고 있다. 올 10월에는 아프리카 남아공에 30여명의 성도들이 방문해 선교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김 목사는 “이러한 단기선교를 통해서 선교현장을 직접 보게 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좋은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함과 동시에 현장을 보면서 선교의 필요성을 깨닫는 비전 트립의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총회에서 자매결연 맺어진 3교회의 생활비를 부담하는 것은 물론, 학원선교, 병원선교, 군 선교, 해외 선교비 지원, 필리핀 대안학교와 유치원 운영 등의 사역을 펼치고 있다. 특히 필리핀의 경우 신대동교회 학생들이 함께 가서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교역자를 선정하여 예배를 드리며 그 곳 사역자들의 선교비 지원과 현지 어린이들을 위한 지원사역을 장기간 펼치기도 했고, 신대동교회는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여행을 해외 단기선교여행으로 보내고 있으며 단기선교를 위한 일정비용을 교회가 지원함으로써 초등학생에서 청년부까지 단기선교지원을 통한 선교비전을 심어주고 있다.


▣ 신대동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와 김 목사의 목회 철학
신대동교회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다. ‘오직 말씀운동’과 ‘설교’에 중점을 둔 목회를 지향하고 있다. 김 목사는 “목회자에게 설교는 생명과 같습니다. 그래서 설교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MTS(Mission Training School)교육을 통해서 소그룹 리더를 기르는 것에 중점을 둔 목회를 지향하고 있는데 MTS는 교회에서 120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총회전도학교 과정과 리더훈련을 거치도록 훈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소그룹 리더훈련이 잘 정착되고 있는데 아주 좋습니다. 다른 교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사역”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훈련의 특성을 반영해서인지 신대동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빌딩교회가 아니라 크기가 비슷한 본당, 선교관, 비전관, 문화관 등 총 4개의 건축물로 이뤄져 있고 문화관에는 카페와 체육관 등 다목적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그 외에도 신대동 교회가 꾸준히 추진하고 있는 사역은 경로대학사역으로 벌써 10여 년 째 지속하고 있다. 경로대학은 신대동교회가 지역과 함께하는 교회를 표방하면서 시작했는데 지역적으로 생활수준이 낙후되어 있어 이들을 케어 하기 위한 목적에서 ‘장수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는 노인대학에는 100여명의 어르신들이 참석하여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장수대학 사역은 불신자들이 전도로 이어지는 열매로 이어지기도 해 일석이조다. 어르신들이 장수대학에 참석해서 식사도 하시고, 선물도 받아가면서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대동교회는 교회 규모에 비해 문화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다. 그 외에도 NGO에 가입되어 시청에 평생교육원으로 등록돼 있는 늘푸른교육봉사협의회가 있는데 이는 일반교육시설로 등록이 되어 바우처를 통해 문예교실을 운영해 오고 있다.

김목사는 변화를 즐기는 목회자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 보다는 어느 정도 검증되어 있는 것을 따라가는 편이다. 그러나 예배만큼은 철저하게 강조하며 설교를 위한 준비에 많은 시간과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왜냐하면 프로그램 중심의 목회가 성도들을 성숙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도를 변화시키고 성숙시킨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김 목사는 총회나 노회 등의 특별한 일정을 소화하는 일이 아니라면 최대한 교회를 비우지 않고 새벽예배와 철야예배까지도 직접 챙기고 있다.

“프로그램이 아닌 말씀으로 교회를 이끌어가고 교인들이 은혜 받고 감동받았다는 말씀을 들을 때 마다 더욱 더 열심히 예배를 준비하고 있다”고 김 목사는 전했다. 신대동 교회의 향후 계획은 지역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예배당 건물을 빌딩건물로 세워서 예배, 문화, 교육을 함께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인근 와동아파트의 재건축이나 갑천 근처에 인터체인지가 개설 되는 등 주변 환경의 변화를 고려한 결정이기도 하다.


▣ 감사와 인사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다들 어렵게 지내면서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모범적으로 하고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자신이 훌륭하지도 않은데 성도님들이 다 이해해 주시고 함께하며 기도해 준 덕분으로 목회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교인을 만난 것은 목회자에게 행복의 요소입니다. 우리교회가 오늘에 이른 것은 어려운 가운데 성도들이 각자 주신 역할을 잘 감당해 주셨고 부족하지만 목회자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대담 및 사진 : 발행인 오종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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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14 [14:54]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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