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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한국교회의 풍성한 유산: 영계(靈溪) 길선주 목사②
임열수 목사/방주기도원 원장
 
보도1국   기사입력  2016/12/30 [14:51]
▲ 임열수 목사 / 전, 건신대학원대학교 총장, 방주기도원 원장     ©편집국
길선주 목사의 회심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던 것이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회심하도록 하신 그 성령님께서 길선주를 한국 기독교를 굳건한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해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이러한 신비로운 체험을 한 길선주는 강력한 소명의식이 생겼고,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 징표로 그는 머리를 깎았으며 기도와 성경연구에 몰두하였고 전도에 힘썼다. 부모에게 전도하였고 상점을 정리하고 평양에 개설하여 성공하고 있던 한약국도 정리했다. 예수를 믿게 된 그는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게 되었고, 장대현에 있는 본인의 땅 800평을 비롯한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게 되었다. 김종섭을 통해서 이길함(Graham Lee)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설교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아 6개월 후에는 완전히 신앙을 고백하여 1897년 8월15일 널다리 골(판동)교회에서 이길함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97년에 세례를 받은 길선주는 다음해인 1898년에 평양 널다리 골에 영수가 되었다. 이때 길선주는 평양노회 소속의 널다리골 교회 안에 ‘예수학당’을 설립하고 교육 사업을 시작했는데, 후에 숭덕학교와 숭현학교로 발전하였다. 교회도 급성장하여 널다리 골에서 장대현으로 옮겨 1900년에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한국식 교회 건물을 세우고 장대현교회라 칭하게 되었다. 장대현 교회는 1900년 6월 한국교회 최초의 장로인 김종섭 장로가 장립하면서 당회가 조직되었고 그때 성도의 숫자는 1,400여명이 되었다.
 
1901년 6월 길선주는 한국 선교를 시찰하러 미국 장로교회 대표로 내한한 브라운(A. J. Brown)목사의 주례 하에 방기창과 함께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이들이 장립됨으로 장대현 교회는 18명의 장로를 모신 교회가 되었고, 이들이 당회원으로 행정권을 부여받고 힘을 합쳐서 교회를 섬기게 됨으로 전보다 몇 배의 활기를 띄게 되었다. 길선주 장로는 1902년 장대현 교회와 황해도와 평안도 교회 부조사(副助事)로 임명받아서 선교사들을 도와 세 교회를 돌보게 되었다.
 
그는 평양 사창골 “부인교회”에 자주 나가 예배를 인도하곤 했다. 유교에 뿌리를 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깊숙이 뿌리박힌 한국 사회에 여전도회 운동을 적극 장려함으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었다. 성경을 수없이 읽은 길선주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고 판단하여 당시 조선의 잘못된 관습을 뜯어 고치고 싶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여권신장(女權伸張)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는 민족운동에도 앞장서서 생명을 걸고 헌신했다. 일본이 1910년 한일합방을 하고 한국인을 식민지화할 뿐 아니라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여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을 이끌었고, 결국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하게 되었다.
 
영혼을 구원하고 민족을 살리는 기독교가 가장 옳다고 판단된 길선주는 교회 일에 전념하기 위해 1903년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된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길선주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기며 감사했다. 한국인 최초로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보다 더 정성을 쏟아 성경연구에 전력을 기울였고 기도에도 전념하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교회에 와서 가르치는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신학교에서 성경에 대해서 배울수록 영혼구원에 대한 상한 심정이 생겨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도에 전념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열심 있는 길선주에게 육신의 가시를 통해서 새로운 훈련도 시키셨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려면 성경과 다른 신학 서적을 읽어야하기 때문에 눈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시력이 크게 상실되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한의사였던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다 동원해서 치료되지 않자 서양의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의학박사 해리 파이팅(Harry Whiting)을 통해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얼마 후 급성 늑막염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도 어쩔 수 없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루드로우(A. L. Ludlow)박사의 수술을 받고 생명을 건져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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