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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천년왕국설 중에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유영권 목사(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천안지회)소장)
 
편집국   기사입력  2016/01/05 [15:50]
▲ 유영권 목사(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천안지회)소장)     ©편집국
후천년설을 취하기 어려운 이유
후천년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재림 전 천년왕국의 성취의 배경으로, 후천년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복음전파와 과학의 발달 등을 제시한다.
 
한 쪽에서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평화의 시대가 세워진다고 믿고 있으며, 한 쪽에서는 과학의 발달로 살기 좋은 시대가 도출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전망은, 이제까지 변화해 온 세상을 바탕으로 하여, 변화할 미래의 세상을 예측을 할 때, 동의 세력이 결코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곧 재림 전 평화의 시대가 만들어지고,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라는 주장은 더욱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인데, 이 두 설은 어떠할까?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의 난제
천년왕국은 계시록 20장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년왕국을 설명하면서, 계시록 20장을 피해갈 수는 없다. 20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두 설의 주장과 문제점을 살펴보자.
 
천년을 중심으로,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시점에 사단이 결박당하고, 무저갱에 갇힌다. 말씀과 증언의 삶으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영들과, 우상에게 경배를 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난다. 이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하였다.
 
천년을 중심으로, 천년왕국이 끝나는 시점에는, 사단이 잠시 풀려나고, 사단이 세력을 모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을 둘러섬으로 전쟁이 일어난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사단의 세력을 부수신다. 사단은 유황불못에 던져짐을 받는다.
 
계시록 20장의 난제 -무천년설의 문제
무천년설은 천년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예수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천년왕국의 기간으로 본다. 물론 천년왕국 자체 역시, 물리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지 않고, 영적 그리고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재림과 동시에 죽은 성도들은 부활하고, 살아있던 성도들은 부활체로 변하여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서 서게 되고, 심판을 거친 후에 천국에 입성하게 된다.
 
만일 천년왕국을 무천년설의 주장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 천년왕국 시작 전이라고 하면 일단은 예수님 초림 때로 돌아가야 하는데, 초림 때에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초림 때에 부활이 일어난다는 것은 일반적 부활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무천년설을 받아 들이려면 계시록 20장 5절에 제시되고 있는 ‘부활’에 대한 새로은 해석이 요구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중생을 부활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게된 것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사단의 활동이다. 사단이 결박되었다가, 풀어나려면, 재림 때인데, 재림 전인 현재에 나타나는 사단의 활동에 대한 언급이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온 주장이 전쟁과 비교하여 상황상 끝났지만, 전세의 결론은 이미 났지만 이곳 저곳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지엽적인 전투로 생각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즉 예수님의 초림과 죽으심을 통해 마귀는 결박이 되었고, 그 상황은 변함 없지만 사단의 활동의 여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무천년설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가?
 
전천년설의 문제
전천년설은 재림 후 이루어 지는 천년왕국이다. 즉 재림 후에 사단이 결박을 당한다. 죽은 성도들이 부활한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리고 심판과 악의 세력의 완전한 멸절은 천년 후에 일어난다. 부활이 두 번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또한 부활이 순차적으로 나누어서 일어난다. 이것 때문에 두 번째 부활을 불신자들의 부활이라고 한다.
 
순교한 사람들의 부활이 있고, 천년왕국 동안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가? 20장 1절부터의 사건이 재림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인가? 천년 뒤에 심판 때에 등장하는 주님의 오심이 재림은 아닌가? 즉 재림의 시점과 사건이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주장을 그댈 받아들여도 될까?
그렇다면 결국 어떠한 주장을 받아 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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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1/05 [15:50]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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