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들다고 느낄 때는 어느 때일까요? 아무도 자기를 돌보아주지 않는 가운데 혼자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일을 당해도 자기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견딜만합니다.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하갈의 운명은 세상 말로 하면 참 기구했습니다.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지만 지금은 가나안땅에 살고 있었고, 그것도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래가 그를 아브람의 둘째 아내로 넣어주는 바람에 잠시 좋았습니다. 더구나 아브람의 씨까지 잉태했으니 말이지요. 그러나 임신한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자 사래가 아브람에게 바가지를 긁었고, 아브람이 사래보고 당신 맘대로 하라고 하자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갈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오죽 했으면 임신한 여자가 도망갔겠어요? ‘여기 있다가는 죽겠구나’싶으니까 도망갔겠지요.
이때 하갈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 하갈의 심정을 대변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16장 7~8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로 가는 길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습니다. 술은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는 광야지대입니다. 14절을 보면 그곳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었습니다. 가데스는 거룩한 샘이라는 뜻인데 민수기를 보면 가데스 바네아라고도 불렀습니다. 이곳은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는 광야지대로 사막과도 같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술 길 샘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입니다. 지금 하갈이 가나안을 떠나 고향인 애굽으로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오아시스를 만나자 거기서 잠시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물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이 말은 ‘너 참 힘든 인생을 사느라 고생이 많구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인 것은 그때 하갈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갈이 애굽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몰랐겠지요. 그런데 아브람 가정의 여종이 되면서부터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을 겁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그의 종을 하란 땅으로 보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종이 하란 땅에 이르러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창세기 24장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종들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께 기도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갈도 역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았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갈에게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갈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16장 13절을 보세요. 하갈은 자기가 하나님을 뵈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은 고난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창세기 16장 7절 이하 말씀은 말할 수 없는 고난 중에 하갈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창 16:6)
이 말씀을 보면 하갈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장 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갈 편은 누구도 없었고 하갈이 갈 곳은 어디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 고난은 하갈이 자초한 겁니다. 자기가 임신했다고 주인을 멸시하지만 않았다면 아브람 집에서 편하게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애를 가졌다고 주인여자를 멸시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래는 물론이지만 아브람도 하갈 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갈에게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요, 피난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갈을 하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갈 편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만나주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6장 10절과 11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놀랍잖아요?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서 태어날 자손들에게만 번성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하갈이 낳을 아들을 통해서도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만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고 지어주신 것이 아니라 하갈이 낳을 아들의 이름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18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실 때 애굽 왕 바로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히브리라는 말은‘하비루’에서 나왔는데 하비루는 나라도 없이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면서 하찮은 노예계층의 사람들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말했을 때 웃었을 겁니다. 그때는 강한 자가 믿는 하나님을 참 신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하게 여호와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이시고, 고통당하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하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약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약자의 편이어야 하고, 고통 받는 자의 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고통당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난을 당해도 낙망하지 말고, 오히려 고난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만드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창 16:11)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하기를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는 겁니다. 요즘은 아들, 딸 구별이 없지만 당시에는 아들, 딸 구별이 분명했습니다. 딸은 낳아봤자 별 소용이 없을 때입니다. 아들을 낳아야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니 하갈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은 정말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이스마엘의 뜻은 ‘하나님이 들이신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이 하갈이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를 들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갈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그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부르짖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고통이 너무 커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렘 33:3)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르짖는다고 하는 말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갈도 정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아니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갈은 의지할 사람도 없었고, 오갈 때도 없었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워요. 거기에다가 먹을 양식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하갈이 그런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갈을 만나주시고, 하갈이 낳을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인 이스마엘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창 16:13,14)
하갈이 자기가 만난 여호와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입니다. ‘살피시는 하나님’은 히브리어로는 ‘엘로이’입니다. 이 말은 ‘나의 눈으로 확인한 하나님’ 또는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갈은 자기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하면서 하나님을 만난 술로 가는 길옆에 있는 샘을 ‘브엘라해로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브엘라헤로이는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하갈은 자기의 속사정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억울함이나 고통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하갈이 아브람의 집에 있으면서 들은 풍월이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자기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자기의 고통을 살펴주실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갈이 더 감격했을지도 모릅니다. 멀고 험한 길을 혼자 가다가 동행하는 사람을 만나도 반갑고 힘이 생기는 법인데 하나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그래서 ‘아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하고 그 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브엘라해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나의 속사정을 몰라주고, 그 누구도 나의 편이 되 주지 않고, 어디 하나 손을 내밀 구석이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살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됐을 때 우리를 도우십니다. 시편 40편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그의 발을 반석 위에 두셔서 그의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떤 고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 창세기 16장 7절부터 10절까지 함께 봅시다.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가던 여종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말했습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고난을 피하여 도망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왔다고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사래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갈이 아스마엘을 낳고, 그의 씨가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이 말씀을 들은 하갈이 사래에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창세기 16장 15절에는 하갈이 아브람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사래의 말에 순종하면서 지내다가 드디어 이스마엘을 낳은 겁니다. 사실 이 때 하갈은 아주 중대한 결단을 한 것입니다. 처음 집을 나갈 때의 결단보다 더 큰 결단을 한 것입니다. 자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고난이 왔다고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다고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갈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하갈처럼 ‘엘로이,’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삶의 현장을 ‘브엘라해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우물’로 만들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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